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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탄과 황제

10. 귈 자미(테오도시아 성당) & 몽골교회 & 몰라 규라니 자미 =『다시 스는 술탄과 황제』 73, 218, 424쪽 참고 (구간 339, 340쪽 참고)

Gül Camii("The Mosque of the Roses")

& Church of Saint Mary of the Mongols

& Molla Gürani Camii(Vefa Kilise Camii)


물라 규라니 자미

베파 지구에 위치한 물라 규라니 자미. 원래는 교회였으나 정복 이후 메흐메드 2세가 가장 존경하는 스승의 이름을 따서 지은 모스크이다.

 

물라 규라니 자미의 고풍스런 외양. 2010년 여름과 2012년 봄, 두 차례 방문했는데 이맘(이슬람 성직자)이 바뀌어 있었다.

 

돔의 내부 모습. 중앙에 있던 모자이크는 사라지고, 아치형 창문에 비잔틴 양식이 남아 있다.

 

모스크 가까이에 있는 공동 묘지. 비잔틴(기독교)과 오스만(이슬람)이 함께 영면하고 있다. 그러나 황제의 무덤이라고 추정할 만한 묘는 찾을 수가 없었다. (배낭 멘 내 옆에 서 있는 검은 옷에 터번 쓴 이가 이 자미의 이맘)

 

물라 규라니 자미에서 관리하고 있는 묘지. 기독교인의 무덤은 오래 되고 돌보는 이가 없어서인지 쓰러진 것들이 종종 보였다.

 

 

몽골 성 마리아 교회

 

몽골 교회 입구. 이곳이 아직도 그리스 정교회(Ortodoks, Orthodox)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리는 간판이 교회 입구에 부착되어 있다. 문짝에는 십자가 문양이 선명하다. 이 교회 설립 배경에는 우여곡절이 깃든 이야기가 있다. 미카엘 8세(재위 1261~1282년) 황제의 서출 딸 마리아 공주가 훌라그 칸과 결혼하러 가는 도중 칸이 돌연 사망, 공주는 왕자인 아바카 칸(Abaka Khan)과 결혼하게 된다. 그러나 결혼 생활을 한 지 15년이 지났을 때 아바카 칸마저 암살을 당해 공주는 콘스탄티노플로 귀환, 몽골 성 마리아 교회를 세운다.

 

나무는 좋겠다. 몽골 성 마리아 교회 안뜰에 아름답게 피어난 꽃. 비잔틴 교회 중 몇 안 되는 그리스인 소유 교회 중 하나이다. 마리아 공주의 숨결이 스며 있을 것만 같은 아담한 정원이다.

 

미너렛(첨탑)이 대세인 이 도시에서 이채롭게 눈길을 끄는 몽골 교회의 종탑. 길게 매달린 줄을 흔들어 종을 울려 보고 싶은 작은 충동이 일었다.

 

화려하게 장식된 몽골 교회 내부 모습. 아름다운 교회 내부를 둘러보면서 나는 역사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신앙심 깊은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가 블라헤니아 궁과 그리 멀지 않은 골든 혼 언덕에 있는 이 교회에 가끔 들러 성찬 예배를 보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몽골 교회에서 아직도 소중히 보관하고 있는 술탄 메흐메드 2세의 허가증. 정복 이후 술탄은 자신이 총애하던 그리스 출신 건축가 크리스토둘로스에 대한 배려로 이 교회를 그리스인들이 계속 사용하도록 허락하는 칙서를 내렸다. 이 칙서 때문에 술탄 아흐메드 3세(재위 1703~1730년)는 이 교회를 몰수해 모스크로 바꾸려던 계획을 포기해야만 했다.

 

눈부신 샹들리에가 호화롭게 교회 내부를 장식하고 있다. 크리스마스 즈음 해서 이 교회를 방문한다면 얼마나 더 멋지고 아름답게 꾸며 놓았을까.

 

 

귈 자미(성 테오도시아 교회)

성 테오도시아 교회에서 모스크로 모습을 바꾼 귈(The Rose) 자미. 성녀 테오도시아의 축일인 5월 29일(1453년)을 맞아 신자들이 장미꽃을 들고 모여든 날,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됨으로써 비잔틴 제국은 무너졌다.

 

성 테오도시아 교회(귈 자미)의 본래 모습. 정복 이후 오스만 군대가 이 교회에 와 보니 성당 안팎으로 장미꽃이 가득해 '장미 사원'이란 별칭을 얻게 되었다. 한동안은 황제의 시신이 장미로 장식된 관에 넣어져 이 교회 나이브 오른쪽 기둥 밑에 묻혔다는 풍문이 떠돌기도 했던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