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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탄과 황제

37. 반지하 비잔티움 교회=『다시 쓰는 술탄과 황제』 373, 461쪽 참고 (구간 362쪽 참고)

 A Semi-basement Byzantine Church


석굴 교회의 입구(2012년 봄). 삼중 성벽 중 내성벽과 외성벽 사이의 통로는 폭이 10~20미터여서 군마의 자유로운 이동이 가능했다. 그러나 유일하게 이곳에만은 그 통로의 3/4을 막아선(?) 낡은 건축물이 있다. 내성벽에 딱 붙여 지은 반 지하 비잔티움 교회이다. 벽이 움푹움푹 파이고 벽돌들도 많이 떨어져나가 금방이라도 폭삭 허물어져 내릴 것만 같은 모습이다. 랜턴 불빛에 의지하지 않으면 대낮에도 어두컴컴해 내부를 관찰하기 어렵다. 떨어진 벽돌 몇 개가 바닥에 나뒹굴어 있다.

 

2010년 여름, 처음으로 방문했을 때의 석굴 교회 입구 풍경(위 사진과 비교해 보라). 그때만 해도 출입구 오른쪽에 걸인들이 잠자리로 삼아 몸을 눕힌 듯 더러운 소파가 있고, 그 위에는 천 조각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인디아나 존스>의 한 장면 같지 않은가.

 

어둠침침한 석굴 교회 내부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비잔티움 문양의 부조물. 1988년 성벽 보수 공사 도중 발견된 이 건축물은 실리브리 히포제(석관실)로 밝혀졌는데, 이미 내부가 도굴꾼들에 의해 많이 훼손된 상태였다.

 

장례를 치르며 슬퍼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돋을새김으로 새겨져 있는 대리석 관. 프레스코 벽화들로 가득 찬 벽면은 석회 반죽이 입혀진 데다가 훼손이 심해 대부분 내용 파악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도굴꾼들이 케이크를 자르듯 여러 조각으로 잘라 훔쳐간 석관 중 일부가 발견되어 고고학 박물관으로 옮겨져 복원되었다.

 

서 있는 사람의 눈높이 정도 벽면에 비잔티움 시대의 십자가가 뚜렷하게 돋을새김으로 부조되어 있다. 이 석관실은 1993년에 보수 공사를 마쳤지만 아직까지 본격적인 연구는 시도되지 않고 있다. 내 책 『술탄과 황제』의 중요한 모티브를 제공해 준, 나로서는 잊지 못할 장소이다.

『술탄과 황제』 3부에는 이곳을 발견하게 된 계기를 소개했었는데, 이번에 개정판을 내면서 그 내용이 빠졌다. 개정판 독자들을 위해 책에 있던 내용 그대로 아래 옮겨둔다.


『술탄과 황제』 3부 361~365쪽

  2010년 8월 8일, 그날 나는 해가 제법 남아 있는 오후에 알튼 카프(황금문)를 지나 북서쪽으로 성곽을 따라 걷다가 실리브리 카프(페게 문)에 이르렀다. 2중 성문을 통해 시내로 들어갔다가 나오는 길이었다. 오른쪽으로 조그만 출입구가 보이고 그 사이로 샛길이 나 있었다. 성벽에 가려져 보이지는 않았지만 샛길 끝에 뭔가가 있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호기심이 발동한 나는 성벽 사이에 난 좁은 길로 걸어 들어갔다. 이 길은 1453년 당시 마지막 혈전이 치러졌던 페리볼로스(Peribolos : 내외성벽 사이의 통로)다. 첫 번째 방어탑이 보이는 순간 길이 넓어지면서 조그만 교회 건물이 나타났다. 가까이 가서 보니 벽이 군데군데 움푹 파이고 벽돌들도 많이 떨어져나가 금방이라도 폭삭 허물어져 내릴 것만 같은 석조 교회(Chapel)였다. 지하로 절반쯤 잠긴 대리석 문 옆에는 노숙자들이 잠자리로 삼아 몸을 눕힌 듯한 더러운 소파가 있었고, 그 위에는 빈 술병과 음식물 쓰레기 등이 어지럽게 나뒹굴어 있었다. 이 안에는 과연 무엇이 있을까? 동행했던 사람들은 삼중 성곽 사진 찍기 좋은 곳을 헌팅하려고 큰길 쪽으로 나간 지 오래고 나 혼자였다. 그러나 으스스한 두려움보다 좀 더 강한 호기심이 나로 하여금 랜턴을 켜 들고 석굴 안을 비춰 보게 만들었다.

  집시풍의 사내 하나가 올빼미 눈을 하고 석굴 밖으로 나왔다. 보디랭귀지가 통했는지 그는 나에게 들어오라고 손짓을 했다. 그러고는 앞서 들어가 두 개의 촛대에 불을 밝혔다. 열 평 남짓 돼 보이는 석굴 안이 어렴풋이 정체를 드러냈다. 나는 랜턴 불빛으로 벽면과 천장, 바닥 등을 구석구석 비추어가며 석굴을 탐색했다. 육지 성벽의 내벽을 아예 오른쪽 벽으로 삼아 지은 조그만 반 지하 교회였다. 

  아마도 비잔티움 시대에 장의실(葬儀室)로 쓰던 교회 같았다. 어둠침침한 지하 공간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부조물들이 얼핏 그런 느낌을 주었다. 아니나 다를까, 눈높이의 중앙 벽면에 비잔틴 시대의 십자가가 돋을새김으로 새겨져 있고, 바닥에 누운 석관 하나가 눈에 띄었다. 여기에 일단 시신을 안치한 뒤 장례 미사가 끝나면 성벽 바깥 조도쿠스 페게(240쪽 참고, 개정판 252, 271쪽 참고) 수도원 묘지에 안장하려 했을 것이다. 성수(聖水)가 솟는 샘이 있는 그 수도원은 영생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었다. 건립 연대가 언제인지도 모르고 이미 교회로서의 기능은 잃었으나, 이곳은 이스탄불 어느 유적지도에도 표시되어 있지 않은 오래된 비잔티움 교회*가 분명했다.

* 최근 자료 조사를 해본 결과 이곳은 '실리브리 히포제(Silivri Hipoje)'로 밝혀졌다. 히포제란 '석관실'을 의미한다. 1988년 성벽 보수 공사 도중 발견되었는데 이미 내부가 도굴꾼들에 의해 훼손된 상태였다. 석관들엔 예수와 열두 제자, 황제와 황녀, 시종들 모습 등이 새겨져 있었다. 4~5세기 건축물로 추정되며, 프레스코 벽화들로 가득 찬 벽면은 석회 반죽이 입혀진데다가 훼손이 심해 내용 파악이 불가능했다. 도굴꾼들이 여러 조각으로 잘라 훔쳐간 일부 석관은 나중에 발견되어 고고학 박물관으로 운반, 복원되었다. 석관실은 1993년 보수 공사를 했지만 아직까지 본격적인 연구는 시도되지 않고 있다.

  석관은 뚜껑이 한 뼘쯤 열려 있었지만 아주 작은 틈새여서 랜턴을 비추어도 내부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10터키리라를 수고비로 주고 사내의 힘을 빌려 둘이서 낑낑대며 겨우 뚜껑을 반쯤 열었다. 랜턴을 비추자 뼛조각인지 돌조각인지 작은 부스러기들이 보였다. 사내가 손짓으로 아무것도 없다는 시늉을 해보였다.

  분위기가 음산했다. 이제 그만 나갈까 하다가 랜턴을 깊숙이 넣어 다시 한 번 석관 안을 들여다보았다. 한 쪽 귀퉁이에 먼지가 수북했다. 조금 이상하다 싶어 가지고 온 스틱으로 눌러보니 쑥 들어가면서 뭔가가 스틱 끝에서 반응한다. 먼지를 대강 밀어내고 랜턴을 바짝 비추자 물체의 한 쪽 부분이 보인다. 석관을 밀어 주었던 친구는 후덥지근한 날씨에 맥주 생각이라도 났는지 그새 사라져 버렸다.

  혼자 남은 나는 등줄기에 맺히는 식은땀을 느끼며 허리를 굽혀 조심스레 그 물체를 들어올렸다. 수북한 먼지를 손바닥으로 밀어내자 해진 비단(?) 보자기로 감싸인 뭔가가 있었다. 손가락 끝이 가늘게 떨렸다. 뜻밖에도 겉장이 뜯겨져 나간 작은 책자였다. 원래 두 권이었는지, 한 권이 반으로 나뉜 건지 책은 두 조각으로 분리돼 있었다. 색은 바랠 대로 바랬고 모양새는 너절했지만 종이는 양피지인 듯 고급스런 느낌이다. 그림 같은 글씨는 그리스어와 라틴어가 섞여 있는데 나로선 판독이 불가능했다. 한두 페이지 넘기려니 양피지가 쉽게 갈라지고 부스러진다. 고인이 애송하던 성경 구절인가. 아니면 일기장이나 비망록? 50여 페이지는 될 것 같다.

  기념으로 가져갈까 하다가 원래 자리에 얌전히 놓아두었다. 그럴 가치도 못 느꼈지만, 국립중앙박물관에 가서 본 천마총 <천마도>**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자작나무 껍데기에 그린 그 그림이 원형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된 이유도 발굴 당시 햇빛과 카메라 플래시 노출 등 부주의한 관리 탓이었지 않는가.

** 국보 제204호. 1973년 경주 천마총에서 발굴되었다. 그때만 해도 지금처럼 보존 기술이 발달하지 않고 사후 관리에 소홀해 원형이 많이 훼손되었다. 2009년 '한국 박물관 100주년 기념 특별전'을 계기로 고화질 적외선 카메라로 찍은 사진이 진본과 함께 공개되면서 그림 속 동물이 말이냐 기린이냐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었다.

  언젠가 내가 이곳에 다시 올 때까지 영면하고 있기를 바라며 나는 그 작은 비잔티움 교회를 빠져나왔다.

  그로부터 2년, 이스탄불에 와서 40여 일을 머물다가 출국을 하루 앞둔 지금, 불현듯 그 생각이 났다. 아뿔싸, 하마터면 그 고문서와 인사도 못하고 서울로 갈 뻔했구나!

  나는 곧장 택시를 잡아타고 성곽으로 향했다. 오늘 짜놓았던 계획은 모두 바뀔 수밖에 없었다. 택시에서 내린 나는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2년 전 그 교회를 찾아갔다. 있었다. 그 자리에 변함없이 그 반 지하 비잔티움 교회가 있었다.

  그 사이 주인(?)이 바뀌었는지 석굴 교회에서 나온 사내는 2년 전 그가 아니었다. 석굴 안으로 들어갔다.

  분위기는 여전했다. 대리석관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석관을 열려 있고 뚜껑은 보이지 않았다. 그 안은 술병 등 잡동사니들로 어질러져 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하나씩 꺼낸 다음 랜턴으로 석관 안을 샅샅이 비춰 보았다. 보자기도 없고, 양피지 고문서도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졌다. 도대체 어디로 간 걸까.

  그 순간 무슨 묵시처럼 반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 찢어진 책들이 만약 황제의 일기와 술탄의 비망록이었다면?

  "유레카! 오, 유레카!"

  나는 마치 공중목욕탕에서 부력(浮力)의 원리를 발견한 뒤 너무 흥분해 알몸으로 목욕탕을 뛰쳐나온 아르키메데스처럼 '유레카(Eureka : '알아냈다, 찾아냈다, 깨달았다'란 뜻을 지닌 그리스어)'를 외쳤다. 좁은 석굴 안이 울림으로 가득 찼다.

  진실을 위한 허구, 그래, 바로 그것이다! 오래도록 껴안고 살아온 화두가 한순간에 풀린 느낌이었다. 소유하고 있으면 모르나 없어지면 안다고 했던가. (...... 이하 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