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시론] '개헌 위한 개헌'이라도 먼저 하자
단임 직선 대통령 한계 앞에
시대적 소명 다한 현행 헌법
대통령 비극 반복 막으려면
개헌한 후 새 정부 출범해야
새해도 벽두부터 시끄럽다. 촛불과 태극기는 주말마다 거리를 누빈다. 진영 논리와 기득권에 포위된 주장들이 편 가르기와 분열을 재촉한다. 대선후보들은 연일 장밋빛 공약을 쏟아내지만 숨가쁜 국내외 상황을 헤쳐 나갈 당면 대책도 미래 비전도 보이지 않는다. 이 미증유의 아노미 현상은 헌재(憲裁)가 언제 어떤 판결을 내릴지, 대선(大選)은 언제 어떤 구도로 치르게 될지 누구도 모른다는 데에서 기인한다. 대선과 대선 후가 걱정스럽기만 하다.
김형오 부산대 석좌교수
전 국회의장
이 혼란의 한가운데에 개헌 이슈가 자리 잡고 있다. 현행 헌법이 시대적 소명을 다했다는 데는 대선주자 대부분이 동의한다. 개헌 문제만 올바로 정리돼도 국가적 혼란만큼은 막을 수 있으련만 정치권은 의외로 느긋한 모양새다.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나 역대 단임 직선 대통령들의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려면 당장 개헌을 하고, 새 헌법에 따라 새 정부를 출범시켜야 마땅하다.
그러나 이런 선(先) 개헌-후(後) 대통령 선거를 하자는 입장에 반대하는 세력이 만만치 않다. 이들이 권력 구조(대통령제, 이원정부제, 내각제 등) 채택과 대통령 권한 배분 문제를 놓고 시간 끌기를 한다면 개헌은 이번에도 성사되기 어렵다. 유력 대선주자와 그 추종자들일수록 현행 헌법의 막강한 권한을 포기하기를 내심 원치 않는 것 같다. 국회와 시민사회단체에서 마련한 개헌안이 이미 있고 1987년 헌법 개정 때도 국회 발의(9월 18일)부터 대선(12월 16일)까지 석 달밖에 안 걸렸으므로 큰 틀만 합의하면 걸림돌이 없다 해도 그들에겐 마이동풍(馬耳東風)일 것이다.
그래서 나온 안이 우선은 현행 헌법으로 대선을 치르고 취임 1년 안에 개헌을 하자는 주장이다. 일견 합리적이고 현실적으로 들린다. 그러나 여기엔 두 가지 맹점이 있다. 첫째, 당선된 대통령이 설사 재임 중 개헌을 하더라도 자기는 현행 헌법상의 임기와 권한을 그대로 행사하겠다고 나올 수 있다. 최고 지도자의 몰역사관(沒歷史觀)을 우리가 한두 번 본 게 아니지 않은가. 이는 왜 개헌을 하는지 그 본질을 망각한, 국민에 대한 배반 행위다. 그리 될 경우 대한민국은 더욱 끔찍한 5년을 맞게 될 것이다. 둘째, 당초의 약속을 어기고 개헌을 하지 않았을 때의 문제다. 역대 대통령 모두가 개헌을 공약했으나 지키지 않았고, 그래서 본인도 나라도 어렵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 제안은 진정성과 실효성에서 신중한 주의가 요구된다.
요컨대 개헌을 먼저 한 다음 대선을 치르는 것이 상책(上策)이라면, 대선 후 개헌은 중책(中策), 개헌을 하지 않거나 안 하느니만 못한 개헌은 하책(下策)이란 말이다. 그러나 솔직히 지금 상황과 여력으론 상책만을 고집할 수 없다. 모든 대선주자와 개헌론자들이 합의할 수 있는 공통분모, 최소공배수는 없을까. 개헌이 또다시 헛것(空約)이 안 되도록 이참에 아예 대못을 박는다면 그 방법은? 궁리와 고심 끝에 그 대못은 헌법 속에 박는 것이 가장 확실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개헌 논의는 계속하되 일정 시점(예: 탄핵 결정일)까지 합의하지 못하면 헌법 부칙을 반드시 개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부칙은 ‘개헌을 위한 개헌’ 조항이나 다름없다. 즉 “새 대통령 취임 1년 안에 개헌을 한다(2018년 6월 전국 동시 지방선거일에 개헌국민투표 실시). 새 대통령의 임기는 단축한다. 2020년 4월 국회의원 총선거 때 새 헌법에 의한 새 정부를 구성한다.”(새 헌법이 새로운 대통령을 직선키로 하면 총선과 대선을 동시에 실시). 이보다 더 확실한 개헌 합의가 또 있을까. 대통령과 정치권도 더는 개헌을 가지고 ‘장난’을 치지 못할 것이다.
이제 정치권은 선택해야 한다. 대선 전에 확실히 제대로 된 개헌을 하든지, 아니면 대선 후에라도 임기 단축을 전제로 한 (임시)개헌을 분명히 하든지 결정해야 한다. 그것이 책임 있는 정치인의 모습이며, 예측 가능한 정치다.
DA 300
헌법 부칙만 변경하는 개헌국민투표는 금년 중 실시될 대통령선거일에 함께 하면 되니 특별한 비용과 시간이 들지 않는다. 5년 임기 대통령이 헌법(부칙)에 의해 임기가 단축되면 그는 집권 3년차부터 시작되어 불행한 대통령을 양산한 한국 정치의 고질인 레임덕(권력 누수) 현상을 피할 수 있다. 또한 현행 헌법을 임기 중 개정하면 어떤 경우든 재출마할 수 없게 돼 있는 헌법 규정을 피할 수도 있다. 따라서 올해 새로 뽑히게 될 대통령이 2년여 기간 선정(善政)을 해 국민의 신망을 얻는다면 그도 나라도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6·10 항쟁으로 이룩한 87년 체제가 올해로써 30주년을 맞는다. 피 흘리며 쟁취한 민주주의를 땀 흘려 개선, 성장시키기는커녕 무임승차하려 해서는 안 된다. 정국이 극도로 혼미하고 정치가 한 치 앞을 가늠키 힘든 불확실성의 시대다. 분열과 증오의 정치를 잠시 접고 여야는 당장 ‘개헌을 위한 개헌’만이라도 합의·도출함으로써 국민에게 예측 가능한 정치를 보여주길 바란다. 믿을 수 있는 국회, 국민을 안심시키는 정치의 모습은 이런 데서 출발한다.
김형오 부산대 석좌교수·전 국회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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