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중앙> 2019 신년 인터뷰 기사를 올립니다. 기사 원문은 아래 URL을 참고하시면 됩니다. 제가 보낸 원고와 실제 기사 내용이 조금 달라진 부분이 있어 제 원고도 아래 추가로 실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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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신년 인터뷰
(김형오 전 국회의장) 2019. 1.
“미래 비전, 국정 운영 방향부터 바로 제시해야”
거침이 없었다. 막힘도 없었다. 그는 시간으로는 고금을 가로지르고 공간으로는 동서를 종횡무진하며 해박한 지식과 정연한 논리로 현 정부와 정치권, 그리고 국민을 향한 작심 발언을 쏟아냈다. ‘쓴소리’로 들리겠지만 ‘바른 소리’였다. 김형오 전 국회의장. 20년 동안 몸담았던 정치라는 숲의 한복판에서 홀연히 걸어 나와 인문학 작가의 길을 가고 있는 그에게서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나무와 숲을 동시에 보는 통찰력이 느껴졌다. 억양은 높지 않고 표현은 절제됐으나 결기와 단호함이 배어 있었다. 바로 이 점에서 역설적으로 그가 정치 일선을 완전히 떠났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두 시간에 걸친 인터뷰는 책 이야기로 시작됐다.
■ 백범에게 길을 묻고 길을 찾다
—『(다시 쓰는) 술탄과 황제』로 독서계는 물론 학계와 문단까지 놀라게 하며 정계 은퇴 이후 작가로 진로를 틀었다. 2년여 전엔 정치 시사 칼럼집 『누구를 위한 나라인가』로 우리 사회에 진단서와 처방전을 내밀기도 했다. 2018년 6월, 『백범 묻다, 김구 답하다』란 신간을 펴냈는데, 어떤 책인가?
“보통 사람(백범-白凡: 백정과 범부, 일반 국민)의 물음에 김구 선생이 답변하고, 내가 해설과 의미를 덧붙여 쉽고 간결하게 풀어쓴 새로운 형태의 문답식 『백범일지』다. 그러나 내용은 깊고 풍부하다. 백범을 비롯한 수많은 선열이 피와 땀과 눈물과 목숨을 바친 끝에 탄생시킨 이 나라의 소중함을 알고, 공동체의 일원인 국민 특히 젊은이들이 공동체를 지켜나가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를 느끼고 생각하게 하려는 마음으로 책을 썼다.”
—지금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회장으로 일하고 있다. 백범에 천착하게 된 계기는?
“김구 선생은 국민 모두가 존경하는 인물이다. 나 역시 백범을 존경하고 관심이 많았는데 김신 장군께서 당신이 맡아왔던 자리를 감당해 달라고 요청하더라. 김구 선생의 아들인 분이 간곡히 청하기에 운명인가 보다 하고 수락했다. 정치는 더 이상 할 생각이 없기 때문에 선생의 삶과 자세를 선양하는 데 힘을 보태는 일도 뜻이 깊겠다 싶어 협회장을 맡았다.”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인 새해 2019년을 맞는 소감은?
“임시정부 100년은 한 세기에서 다른 세기로 넘어가는 과정이다. 지난 100년 우리는 선열들의 피땀과 목숨으로 나라를 되찾았고, 또 그 나라를 지키고 건설했다. 앞으로의 100년은 세계 속에서 한국의 위상을 제대로 정립하는 시기, 한국이 세계 평화와 인류 발전을 위해 기여하는 100년이 돼야 할 것이다.
협회 차원에서도 2019년 3·1운동과 임시정부 100주년, 그리고 백범 서거 70주기를 기념해 책을 펴낸다. 2018년 6월에 낸 『백범의 길』 국내 편에 이은 중국 편이다. 한·중 합작으로 11명의 학자들이 상하이임시정부에서부터 충칭임시정부까지 김구 선생을 필두로 독립운동가들의 발자취를 더듬었다. 1919년부터 1945년까지 26년의 기간을 거치면서 임시정부는 여러 곳에 둥지를 틀었다. 그 현장을 직접 방문해 행적을 탐문하고 사료를 찾아 기록하는 인문학 에세이 형식의 답사기다. 임정 수립일인 4월 11일에 즈음해 책을 낼 예정이다.”
■ 나라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다. 문재인 정부 국정 운영의 가장 큰 맹점, 문제점은 무엇인가?
“출범한 지 1년 반 정도 됐는데 몇 년 지난 것만 같다. 왜 이런 느낌이 들까? 한마디로 정부·여권이 모든 곳을 압도적으로 장악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에 대한 희망·비전을 뚜렷이 제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도대체 이 나라를 어디로 끌고 가려는 건지 국정 운영의 기본 방향과 철학을 가늠하기 힘들다. 문재인 정부의 최대 업적인 남북 관계도 김정은 위원장과의 만남, DMZ 초소 철거, 철도 연결 같은 가시적‧현상적인 실적 말고는 기본 방향, 근본 노선이 무엇인지 모른다.
남북 평화 체제 구축이나 통일은 말로써 달성될 수 없다. 이를 위해서는 정교한 이론적‧철학적 토대와 국민적 공감대가 필요한데 이 점을 소홀히 하기에 국민들은 불안감을 느끼는 것이다. 이 정부가 지향하는 가치는 무엇인지, 또 자주 인용하는 정의‧평화란 무엇을 말하며 어떻게 구현하겠다는 건지 알 수가 없다. 문재인 정부의 지난 2년은 박근혜 시대와는 완전히 달랐고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하지만 자칫 잘못하면 국민들이 지루함을 넘어 지겨움을 느낄 가능성도 상존한다. 지난 시대는 모두 적폐인가. 또 적폐 청산으로 5년 내내 허송할 것인가. 이 정부는 이제라도 미래 비전과 국정 운영 방향부터 바로 세우고 제시해야 할 것이다.”
—이 정부가 타산지석이나 반면교사로 삼을 만한 사례를 든다면?
“문재인 정부는 1960년대 중국의 문화혁명을 참고했으면 한다. 문화혁명 당시 험악한 대치 구도를 대변하는 용어로 이른바 ‘홍전(紅專) 대결’을 들 수 있다. ‘홍’은 이념을, ‘전’은 전문 지식을 이른다. 공산당 이념에 충실한 그룹과 전문가 그룹 사이의 논쟁과 갈등이 문화혁명 내내 불을 질렀고, 당시의 홍위병들이 전문가 탄압에 나섬으로써 중국 역사를 20년 뒷걸음질 치게 했다는 얘기가 있다. 지금의 문재인 정부도 전문가 그룹이 전면에 나서지 않으면 나라도, 정권도 위험해질 것만 같은 생각을 갖게 한다.”
—현 정부엔 전문가가 없다는 의미인가?
“문재인 정부의 주축을 이루는 이른바 진보진영에 속한 사람들은 전문가 그룹이라고 볼 수 없다. 그런데도 전문가를 발탁하려 하지 않는다. 진영이나 캠프 출신이 아닌 정말 괜찮은 적임자를 발탁 등용해 일을 맡겼다는 말을 아직 듣지 못했다. 사회는 복잡하다. 열정과 충성심은 있으나 전문성이 부족한 사람들이 모여 감당하기엔 힘든 것이 국가 경영이다. 최고의 리더십이 오픈 마인드(열린 생각)를 갖지 않는다면 낭패다. 2019년 새해부터는 청와대와 정부가 진영 논리, 자기중심적 행태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래야 국민의 신뢰를 얻고 정권도 안정된다. 안 그러면 시간이 지날수록 지지율은 더 떨어지고 나라 경영도 위태로워질 것이다.”
—소득주도 성장 정책(‘소주성’)에 치중하는 정부의 모습을 볼 때 그런 변화가 쉬 일어날 것 같지 않다는 반론도 나온다.
“많은 이들이 소득주도 성장에 문제가 있다고 하지 않는가. ‘소주성’ 기획 추진자들은 이 정책이 국민과 국가 경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깊이 생각하지 않은 것 같다. 소득주도 성장은 그 어떤 국가에서도 검증된 바 없고, 우리 정부가 임기 내 해보겠다고 실험적으로 서두르다 보니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 주 52시간 근로 시간 제한 등도 목표 중심으로 경제 산업 구조를 몰아가려는 식이다. 박정희 시대 개발경제 연간에는 통했지만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목전에 두고 있는 지금 국가 주도의 경제사회 정책은 반드시 실패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시대가 바뀌었다. 민간과 기업이 창의와 자율‧활력을 잃으면 경제는 성장을 멈추고 국민은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 국민을 잘 먹고 잘살게 하겠다는 게 경제 정책의 근간임에도 국민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는 아이러니한 현실에 직면해 있다. 세계 경제가 비교적 호황이고 미국과 일본 경제도 좋은데 우리만 나쁘면 책임자를 바꾸고 정책을 전환해야 한다. 대선 공약에 너무 집착하지 말아줬으면 한다. 이번 겨울 한파보다 더 혹독한 경제 한파가 몰아칠까, 우리 서민들의 삶은 얼마나 더 피폐해질까 걱정스럽다.”
■ 분노만으로 나라를 다스릴 수는 없다
—어떤 이는 ‘정치는 적(敵)을 적절히 만들어 가는 게임’이라 했다. 정치권은 여전히 적과 동지라는 이분법적 사고에 갇혀 있다. 타개책은 무엇인가?
“단재 신채호 선생은 <조선상고사>에서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 투쟁의 기록’이라고 규정했다. 신채호 당시에는 가혹한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국권을 회복하고 역사 왜곡도 바로 잡으려면 나와 남을 제대로 구분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게 바로 민족주의 사관이었다. 해방된 지 70여 년이 지났건만 우리는 여전히 민족주의로 포장된 폐쇄성과 적이냐 동지냐 하는 이분법적 사고를 떨쳐내지 못하고 있다.
정치는 가치를 효율적으로 배분하는 것이다. 이 말은 60년대 정외과 학생이라면 다 안다. 그러나 지금의 정치 현실에는 분노와 적개심이 가득하다. 끊임없이 증오의 대상을 만들고 분열과 반목을 거듭한다. 내가 현역 국회의원으로 활동할 때도 그랬다. 선배 정치인에게 정치 잘하는 법을 물었더니 ‘하루에 김대중 욕 한 마디씩 하라’고 하더라. 적을 만들면 정치하기가 쉬워진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나는 내 지역구에서 김대중 씨 욕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그런 정치인으로 남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분열적이고 증오 가득한 정치가 포퓰리즘이나 선동과 맞물리면 파시즘‧나치즘‧전체주의로 흐른다. 급기야 정치 혐오증을 부추겨 정치는 설 자리를 잃어버리게 된다. 이런 정치를 파기하는 게 이 시대 정치인의 바른 자세이자 책무다. 이것이야말로 청산돼야 할 적폐다. 정치인과 국민 모두 대오각성할 때다.”
—증오와 갈등의 정치를 종식할 해법은?
“분노만으로 나라를 다스릴 수는 없다. 현 여권 인사 중에는 분노를 정의로 잘못 아는 사람도 있다. 이런 방식은 단기적으로는 시원하고 성공하는 것처럼 보여도 얼마 못 가 더 큰 분열과 불만‧분노가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적폐 청산은 사람을 표적으로 할 것이 아니라 제도와 관행, 의식에 대한 일대 혁명적 개혁이 돼야 하는데 이 점을 현 정권은 등한히 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헌법을 비롯한 선거법‧정치관계법 등 정치 제도의 일대 개혁, 그리고 정치인과 국민 모두에게 민주시민 의식을 부추기는 의식 혁명이 일어나야 한다. 사랑의 마음과 애국심이 부족한 사람이 정치인이나 책임 있는 자리에 가서는 안 된다. 증오‧갈등‧대립을 부추기는 사람들에 대해 국민 여론이 회초리를 들어야 한다. 지역감정을 조장하거나 선동과 분열을 획책하는 사람은 신문‧방송 등 언론부터 나서서 단죄해야 할 것이다.
—이재수 전 기무사령관이 자살했다. 이 또한 증오와 보복의 정치가 낳은 것인가?
“안타깝고 가슴 아픈 일이다. 명예를 먹고살아야 할 사람이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군인은 국토방위와 조국수호라는 특별한 사명으로 남다르게 사는 사람이다. 일단 유사시에 이들은 목숨을 걸고 국토와 국민을 지킬 숭고한 의무가 있다. 그래서 군인은 투철한 국가관과 애국심, 굳건한 정신력과 높은 사기가 요구된다. 이들이 강할수록 외적의 침략으로부터 보호되고 전쟁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들이 약하면 나라는 위기에 빠지고 국민은 불안하다. 군인은 군인의 세계에서 살아야 한다. 정치화돼서도, 사회화돼서도 안 되는 것이다. 최근 이런 군인에 대해 정치적‧사회적 잣대를 들이댄다. 검찰이 정치의 하수인처럼 이들을 대한다. 군인의 세계를 검찰의 세계로 재단하면 국방은 무너진다. 여러 가치를 균형감을 가지고 조율해야 할 정치가 한편으로 치우치고 있다. 한평생을 조국수호‧국토방위에 몸담은 사람에게 이런 불명예가 없다. 극단적 선택으로 정치권과 검찰에 마지막 항명을 한 것이다. 군의 사기가 걱정된다. 전(前) 정권의 국방장관‧안보실장을 구속시키고 법정에 세우려 한다. 이들은 북한군 훈련소 사격대의 표적이 된 인물이다. 북한의 과녁이 되어 매일같이 수백 발의 총알 세례를 받는 제거 대상 1호를 우리 권력은 법의 이름으로 손발을 묶으려 한다. 북한이 얼마나 고소하게 생각하겠는가. 이런 환경에서 국방을 안심해도 되겠으며, 군의 기강과 사기가 제대로 서겠는가. 누가 몸 던져 조국을 위해 헌신하려 하겠나. 정치가 바르지 못하면 국방이 부실하고 나라가 기운다.”
—포퓰리즘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라 조선 시대로부터 내려오는 오래된 인습은 아닐까?
“조선 시대 당시로 보면 500년 이상 유지된 왕조는 세계사적으로 드물다. 그만큼 조선은 왕조‧왕권을 지키는 데 아주 철저했다고 볼 수 있다. 조선을 제도사적으로 분석한 책(정병석, 『조선은 왜 무너졌는가』) 등에 의하면 사농공상의 질서 속에서 상업과 공업을 천대시한 조선에서는 산업이 일어날 수 없었고 백성들은 가난에 허덕일 수밖에 없었다. 올곧은 선비정신을 강조할 뿐 경제는 관심권 밖이었다. 성리학 중심의 사회 질서 속에서 유학의 한 구절을 놓고 피 튀기는 싸움에 몰입한 것이다.
또 임진왜란 당시 수십만 명이 포로가 되어 끌려갔는데 나중에 선비들은 다 돌아왔지만 유독 귀국을 거부한 이들이 있었다. 바로 전문 기술자들이다. 제지공‧도공‧직조공들은 일본 상류층에서 제대로 대접을 해주니까 현지에 정착하기로 했다. 요즘으로 말하면 연구개발 즉 R&D까지 전폭적인 지원한 것이다. 그래서 허구한 날 양반의 수탈을 당하던 조선보다 일본 잔류를 선택했다. 당시 우리는 일본을 얕잡아 봤지만 일본은 이런 기술 우대를 통해 일어섰고 우리는 그러지 못한 것이다. 전문가를 대우하지 않고, 중상주의를 배격한 게 과거의 우리 모습이었다. 그래서 나라가 가난했다. 이 틀을 깬 사람이 박정희 전 대통령이었다.”
—조선 왕조는 일본의 봉건제와는 달리 중앙집권 국가로서 죽기살기 식의 경쟁이 없었기 때문에 권력 다툼은 강했지만 현실에 안주하는 경향이 강했다는 지적도 있더라.
“우리는 세계에서 보기 드물게 지방분권의 경험이 없는 나라다. 중앙에서 모든 관리를 지방으로 파견했다. 그렇게 내려간 감사나 부사‧현감 등은 호령만 하다 떠날 뿐, 일반 백성은 물론 아전이나 지방 토호들과도 물과 기름 같은 관계랄까, 서로 따로 노는 구조였다. 관과 민이 하나 되어 자치‧자활하는 경우는 지극히 드물었다. 그래서 비가 많이 와 홍수가 져도 임금 탓, 비가 안 와 가뭄이 심해도 나라 탓이었다. 이는 지금도 그대로다. 세월호 사건이 터지자 정부는 어찌할 바를 몰랐고 민심은 폭발했다. 정권 위기로까지 몰고 갔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폭발 사고 당시 사망자와 실종자가 2만 명을 오갔지만 지자체장을 비롯해 누구 하나 바뀌었다는 얘기를 못 들었다. 그들은 차분히 수습했다. 단합해야 할 때 단합했다. 박근혜 정부의 몰락은 세월호 때 시작된 것이다. 비싼 대가를 치르고도 교훈을 새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때 정신 차렸더라면 촛불도, 탄핵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의 지방자치도 ‘투표만 있는 자치’를 넘어 ‘실질적 자치’, ‘건전한 자치’, ‘내실 있는 자치’를 해야 할 때다.”
■ 성장이 소득을 주도하는 것
—경제 정책 주도 세력의 면면을 볼 때 어떤 생각이 들던가?
“지난번에 장하성 정책실장을 교체하고 후임으로 그 사람과 노선이 똑같은 사람을 앉히더라. 그럴 바에야 왜 바꿨냐고 묻고 싶었다. 정책이 잘 안 돌아가서 바꿨는데 그런 색채가 더 강한 사람을 선택한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소득주도 성장이란 말은 잘못된 거다. 소득이 성장을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가 성장해야 소득이 증가하고 복지 혜택도 커지는 것이다.”
—기존의 경제 정책을 수정해서 일정한 성과를 거두더라도 자신들에게는 칭찬이나 인정을 안 해주리라는 조바심이 작동한 건 아닐까?
“만약 그런 속 좁은 생각을 가진 이들이 경제 정책을 담당한다면 이것이야말로 문제다. 국민을 볼모로 잡고 정책을 실험하겠다는 것이니까. 정권을 자신들의 전유물로 생각하지 않는 다음에야 어떻게…. 21세기 민주주의 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설령 자기들이 정책을 바꾸어서 그 공(功)이 비판 세력에게 넘어간다 하더라도 이를 받아들이는 게 국가 정책 결정자의 자세다. 그런 경우에도 결국 공(功)은 마지막엔 자신들한테 돌아가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어떤 로드맵을 갖고 있는 걸까. 대통령의 의중을 헤아려 본다면?
“청와대와 연줄이 없는 내가 대통령 본인의 생각을 어떻게 알겠나. 하지만 청와대엔 많은 참모가 있고, 문 대통령도 깊은 생각이 있을 것이다. 이게 아니라고 생각하면 돌아서야지, 나라와 국민을 생각해서라도. 나는 청와대(1982~86,90년), 총리실(1986~90년), 국회(1992~2012년), 다 있어 봤는데 대통령의 자리라는 건 잠시 왔다 가는 자리일 뿐이다. 이 엄연한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면 불행이 왔다. 특히 청와대와 권력 핵심의 ‘충성스러운’ 건의에서 벗어나는 대통령이 돼야 한다. 역대 대통령의 비운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으로서 정말 드리고 싶은 고언이다. 해주면 인기 오르고 지지율 높아진다고 밀어부치는 포퓰리즘 정책은 나라를 10년도 못 가 거덜 내고, 욕먹는 게 두려워 잘못된 정책을 바꾸지 않으면 임기 내에 거덜 난다.”
—여권 내지는 청와대에 대한 문 대통령의 장악력은 어느 정도일까? 눈과 귀를 가리는 586 참모들이 주변에 포진해 있다는 관측도 있는데.
“586이 누군가? 그들도 이미 50대 장년 아닌가? 지금이 어떤 시대인가! 80년대의 이념을 아직도 못 버리고 있다면 그들은 운동권 ‘낡은’ 세대일 뿐이다. 그런 자세로 청와대에 복무하고 대통령을 모신다면 그들도 대통령도 나라도 불행해진다. 그들 중에 혹시라도 선민(選民)의식, 우월주의, 운동권 연대감 같은 것이 있다면 주막에서 막걸리 마시며 할 얘기지, 그런 자세로 국가 경영을 맡겠다는 생각은 아예 버려야 한다.
해리 트루먼 전 미국 대통령이 한 말이 있다. ‘The Buck Stops Here(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참모에 둘러싸여 있다는 말이 나와서는 안 된다. 그런 말이 세간에 떠돈다는 사실 자체에 대통령은 유의해야 할 것이다. 참모는 참모일 뿐이다. 모든 궁극적인 책임은 대통령이 지는 것이다.”
—한국노총 집회에 참석한 박원순 서울시장이 문 대통령이 여야와 합의한 탄력근로제 확대에 반대 의사를 밝히고, 이재명 경기지사는 문 대통령 아들 취업 관련 사항을 언급하는 등 여권의 잠재적 차기 주자들이 독자 행보에 나섰다는 지적이다. 일각에서는 대통령의 권력 누수가 시작됐다는 평가도 내놓고 있다.
“집권 3년차인 올해부터는 권력 내부에서 서서히 고개를 쳐드는 사람이 나올 것이다. ‘포스트 문’을 노리는 사람이 어디 한두 명이겠는가. 더구나 야당이 맥을 못추는 상태니 여권 내부에서 차기를 노린 경쟁이 더욱 정교하면서도 치밀하게 펼쳐질 것이다. 당분간은 물밑에서 열심히 움직이겠지만 말이다. 문재인 대통령과 정부는 이럴 때일수록 국정 어젠다를 재정립하고, 국정 최고‧최후 책임자이며 봉사자로서의 자세를 확고히 보여줘야 할 것이다. 대통령 하기에 따라 3년차 증후군을 잘 극복할 수도 있고 역사에 남는 대통령이 될 수 있다. 잘된 것은 계속 잘하고, 안 된 것은 수정하고, 잘못된 것은 폐기하는 게 바른 수순이다. 그것이 집권자의 역할이며, 이 모든 것의 최종 결정권자는 대통령이다.
레임덕? 그건 필연적이다. 5년 단임제 정부에서 레임덕은 올 수밖에 없다. 받아들일 건 담담하게 받아들이되, 국리민복과 민주주의를 위해 마지막 순간까지 봉사한다는 자세를 흩뜨리지 않는 것이 레임덕 현상을 최소화하는 비결 아닌 비결이다.”
■ 외교 관계의 핵심 축은 한미 관계
—북한 관련 이슈가 문 대통령 국정 지지율을 떠받쳐주는 형국이다.
“과거 박정희 정권 당시 북한 이슈를 정치에 이용하곤 했다. 또 북한이 실제로 간첩이나 무장공비를 남파해 국민들에게 공포심을 심어주기도 했다. 현 정부는 어떤가. 북한 김정은 위원장과의 이벤트가 지금까지는 긍정적이고 고무적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앞으로는 큰 효과가 없을 것이다. 김정은과 북한의 태도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북(對北) 관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핵(核)’이다. 북핵 문제가 알파요, 오메가인데 이걸 제쳐두고 김정은과 일시적으로 잘 지낸다 해서 기대한 효과를 내기는 힘들 것이다.”
—문재인 정부가 한반도 평화 무드 정착에 기여한 것은 어떻게 보나?
“처음에는 문 정부도 잘했다. 늘 전쟁의 불안과 충돌의 두려움이 감돌던 한반도에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남·북·미 정상 회담이 열리는 등 평화 기조가 다져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다음이 문제다. 지금까지의 성공은 보수 정부와 차별화되는 치적임에 분명하지만 완전하고 정상적인 평화는 아직 요원하다. 북한이 북핵을 어떻게 하겠다는 것에 대한 정리가 안 되고, 진도도 안 나간다. 이 문제에 미칠 우리의 영향력은 극히 제한적이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경협을 하거나 철도를 연결하는 정도에 그친다. 그나마 우리가 주는 입장이니까 지원을 약속하더라도 (완전한) 북핵 해결을 요구해야 한다.”
—문재인 정부 들어 한미 관계는 불안해 보인다. 찰스 브라운 미국 태평양공군사령관이 2018년 미 전략폭격기의 한반도 출격 중단과 연합 공군 훈련 비질런트 에이스 취소가 모두 한국 정부 요청 때문이었다고 밝혔다. 또 미국 재무부는 지난 9월 산업은행․기업은행 등 국내 7개 은행에 대북 제재 준수를 요구했다고 알려졌다. 한미 동맹은 탄탄한가?
“21세기 대한민국 국가 전략에서 정말 중요한 게 외교이며 그 핵심 축은 한미 관계다. 한중 관계도 한미 관계의 틀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추진해야 한다. 그런데 걱정이다. 신뢰 관계가 제대로 유지되고 있는지 냉철하게 봐야 한다. 신뢰하지 못하는 상황을 한국이 만드는가, 아니면 미국이 만드는 것인가? 미국에게 중요한 국가는 꼭 한국만이 아니다. 영국‧일본‧EU‧중국‧러시아‧프랑스‧독일 등 다양하게 존재한다. 하지만 한국에겐 단연코 미국이 중요하다. 미국을 대체할 나라는 눈을 씻고 봐도 없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 대북 정책 담당자들은) 국익에 대한 신념과 전문성을 갖춘 외교관이 맞는가라는 의문이 때때로 든다. 지금이라도 미국이 신뢰할 수 있고 미국과 머리를 맞대고 당당하게 외교 전략을 펼칠 수 있는 사람들로 포진해야 한다. 한미 관계가 신뢰에 기반하고 안정된 틀 안에서 대(對)중‧대러‧대일본 관계를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축이 흔들린다는 인상을 주면 곤란하다. 미국 조야(朝野)에서 문재인 정부의 대북‧대중 관계에 불안한 시선을 던진다는 점이 좋지 않다. 국가 간 신뢰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외교의 핵심 요소다.”
■ 국민은 왜 세금을 내는가
—노동계 등에서 법치주의를 훼손하는 일이 잇따른다고 국무총리마저 우려하는 상황이다.
“법치국가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다. 민노총 같은 일부 폭력적인 집단에 의해 공권력의 권위가 바닥에 떨어지는 것은 지극히 우려할 사안이다. 이런 식으로 해서 나라가 제대로 유지될 것이며, 운영될 것인가 걱정이다. 민노총의 폭력성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들의 힘이 약하고 주장이 정의로웠을 때는 오죽 답답하면 저렇게까지 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지금은 국가 공권력에 대항하고 법치국가의 근간을 해치는 지경이다. 청와대도, 국회도, 경찰과 검찰도 눈치를 볼 정도다. 폭력이 자행되는데 공권력은 작동하지 않고 언론도 이를 제대로 보도하지 못한다. 어느덧 우리 사회에 공포 분위기가 감돌고 있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전 미국 대통령이 2차 세계대전 중 연두교서(1941년 1월)에서 4가지 자유를 말하면서 ‘공포로부터의 자유’를 강조했다. 그때는 군사적 위협을 공포로 간주했지만 지금은 폭력과 심리적‧정신적 위협까지 공포의 대상이다. 공포가 엄습하는 사회는 민주주의 사회가 아니다. 전체주의로 가는 길이다. 파시즘‧나치즘이 이런 식으로 발호하면서 기존 정부를 넘어뜨렸다. 단호하게 대처하지 않으면 정부가 존재 의의를 갖기 어렵다.”
—이 문제를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다.
“민간 기업 임원이 노조원에 의해 감금‧집단 폭행을 당했는데도 공영방송에서 진실 보도를 안 한다. 경찰‧검찰도 수사에 미온적이다. 국가로부터 보호받지 못하는 사람과 기업이 나라를 위해 세금을 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정부의 가장 원초적인 의무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일이다. 나를 보호해주니까, 적으로부터 지켜주니까 국민도 의무를 이행하는 것이다. 이번 사태는 국가와 정부의 존재 이유가 근본적으로 도전받은 아주 심각한 문제다. 언론이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하면 안 된다.”
—송호근 포스텍 인문사회학부장은 얼마 전 <중앙일보> 칼럼에서 현 여권 세력을 ‘부패의 척후’로 칭하면서, 정의를 표방하지만 사람만 바뀔 뿐 정·관·공신단체의 이익동맹이라며 날선 비판을 가했다.
“정의가 무엇인가. 유럽의 정의의 여신(유스티티아)은 눈을 가린 채 검을 휘두른다. 불의를 저지른 자는 가리지 않고 처단하겠다는 상징성이다. 문재인 정권이 들어선 당위성 중 하나가 적폐 청산이었다. 낡고 잘못된 제도와 관행이 쌓인 것이 적폐다. 이것들은 당연히 청산돼야 한다. 그런데 그런 제도와 관행을 청산하는 게 아니라 사람 청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것도 전(前) 정부, 전 정권과 관련된 사람들이다. 한국에서는 정의의 여신이 눈을 뜨고 사람을 골라가며 처단하는 것 같다. 그 도(度)가 지나치니 야당에선 정치 보복이라고 하지 않는가. 반면에 현 정부가 청산한 제도와 관행은 무엇인지 모르겠다. 정작 해야 할 일은 안 하고 칼끝이 사람만 쫓아다닌다면 이것은 정의가 아니다. 민주주의에 완성체란 없다. 더 나은 민주주의로 가는 과정일 뿐인데, 그러자면 제도와 관행을 다듬고 발전시키는 데 더욱 노력해야 한다.”
—정부는 잘 돌아가고 있는가?
“정부가 하는 일을 보면 물갈이를 하라 했는데 물은 안 갈고 물고기만 가는 격이다. 그대로인 물에 새 인물을 데려와도 계속 오염될 뿐이다. 국회‧정부‧사회에 고착된 잘못된 관행들을 다 뜯어고쳐야 한다. 야당도 제대로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야당이 오히려 적폐 청산에 앞장서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대한민국은 규제의 천국이라 할 정도로 규제‧제한‧금지‧등록‧심사‧감사‧신고‧허가·시간 지체 따위가 차고 넘친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창의와 자율이 나오겠나. 사물인터넷‧빅데이터‧AI‧자율주행차‧드론 등등 4차 산업혁명은 자유와 창의가 보장되지 않는 풍토에서는 살아날 수 없다. 규제는 기득권 보호 수단일 따름이다. 적폐의 대상들이 적폐를 지키고 있다.”
■ 자유한국당, 존재할 이유는 무엇인가
—6·13 지방선거 직후 열린 한 토론회에서 참패한 자유한국당을 향해 7가지 개혁안을 제시하기도 했는데?
“그래도 (몸담았던 정당으로) 애정을 가지고 있으니까. 문재인 대통령 국정 지지율이 계속 떨어지는데도 자유한국당은 그 지지율을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대안 정당, 대체 세력이라는 이미지를 주지 못하는 탓이다. 수권 정당으로서의 면모를 못 갖췄을 뿐 아니라 노력해서 국민의 신뢰를 얻겠다는 열의도 안 보인다. 자기들 선거(총선)가 많이 남았기 때문인가. 오랜 기간 현실에 안주해온 때문인지 무능하고 나태하다. 자신들이 모시던 대통령이 탄핵되고 구속됐는데도 누구 하나 정계 은퇴나 의원직을 내던진 이가 없고, 차기 선거 불출마를 선언한 이도 한두 명에 불과하다. 임팩트도 없다. 정치인의 기본자세인 책임의식이 결여된 것이다. 서정주의 시 <푸르른 날>이 문득 생각난다.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한때 보수를 지지했던 유권자들에게 희망의 메시지 정도는 줘야 하지 않을까. 정치 철학의 부재가 지금의 상황을 자초했다고 하겠다.”
—지금도 자유한국당에 몸담고 있나?
“탈당한 지 오래다. 국회의장은 국회법에 따라 당적을 가질 수 없다. 제18대 국회 전반기 의장(2008년 7월~ 2010년 5월)이 되면서 당적이 자동으로 사라졌다가 임기를 마치면서 원래 속했던 당으로 복귀했다. 그런데 2016년 4월에 있을 20대 총선을 앞두고 새누리당 공천 과정을 보니 싹수가 노랗더라. 그래서 조용히 탈당계를 제출했다. 얼마 뒤 ‘옥새 들고 나르샤’(새누리당 대표가 공천장 날인을 거부한 사건)가 나오고 난리가 아니었다. 이런 것들을 보면서 실망했고 가슴 아팠고 또 부끄러웠다. 정치와 거리를 두겠다는 생각이 더욱 확고해졌다.”
—야권 일각에서는 ‘박근혜 신당설’이 고개를 들고 있다. 12월 중순 당협위원장 교체 이후 전당대회에서 비박이 당권을 장악하면 친박계가 대구 경북 중심의 신당으로 딴 살림을 차린다는 얘기다.
“국민들 눈에는 살아남기 위한 수단으로 박근혜를 이용하려는 것으로 비치지 않을까. 명분이 확실해야 하고, 신당을 만들 용기가 있어야 한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국민이 공감할 수 있는 존재 이유와 가치를 보여주어야 한다. 자유한국당도 마찬가지다. 자유한국당 중심의 보수 통합론이 나오는데 왜 보수 통합을 해야 하는가, 왜 자유한국당이 구심점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명쾌한 답을 제시해야 한다. 통합을 한다고 할 때 중도 정당으로 갈 것인지, 보수주의 정당으로 자리매김할 것인지, 어디까지 싸안고 무엇을 배제해야 하는지를 가름할 철학이 안 보인다. 이처럼 모든 게 어정쩡한 자유한국당이 중심이 돼야 할 이유가 있을까.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까만 고민하지 말고, 차라리 젊은 세대들에게 자리를 내주고 뒤로 물러나겠다고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이번 원내대표에 이어 내년 봄 새로운 대표가 선출되면 좀 달라질까.”
—이 말을 들으면 유승민 바른미래당 의원이 힘을 얻을 것 같은데.
“보수 통합에 반대하자는 말이 아니다. 여당이 워낙 막강하니까 견제할 세력은 필요하다. 자유한국당이 중심이 되든, 다른 당들이 세를 규합하든 하기는 해야 한다. 야당이 제대로 하면 여당도 목소리를 키워 청와대에 옳다, 그르다 할 말을 하게 된다. 이렇게 여당과 야당은 상생 보완 관계인데, 눈치만 보고 서로 으르렁대기만 하고 제대로 못하니까 청와대가 정치를 주도하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청와대 중심으로 행정도 정치도 이루어지고 있다. 국회는 제 위치를 찾지 못하고, 정국 주도권도 청와대에 넘어가 정치가 불완전하고 민주주의가 후퇴한다는 말을 듣게 되는 것이다. 이 점 여야 현역 정치인들의 책임이 크다.”
■ 파산을 각오하라, 죽어야 산다
—보수 통합과 박근혜 탄핵 평가는 동전의 양면 같다. 이 문제는 어떻게 풀어야 할까?
“보수 통합과 박근혜 탄핵 평가는 동전의 양면이 아니다. 버릴 건 빨리 버려야 한다. 보수가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너무 집착하거나 집중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1700만 명이 촛불을 들었고, 촛불을 안 들었다 해도 많은 이들이 ‘이게 나라냐’고 항의한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새누리당이 웰빙 정당이다 보니 촛불의 서슬에 일부는 겁을 먹었고, 일부는 맹목적으로 박근혜 전 대통령의 입만 쳐다보았다. 그렇게 동상이몽으로 우물쭈물하다가 탄핵에 이르고 정권을 고스란히 내준 것이다. 구(舊) 여권은 국민 요구와 여망에 현명하게 대처하는 지혜가 부족했다.
내가 <한국경제> 신문 1,3면에 걸쳐 당시 박 대통령에게 하야하라는 칼럼을 썼었다. 그때 만약 스스로 하야했더라면 대통령도 온전하고 야당도 지금같이 지리멸렬하진 않았을 터이다. 현 여권이 집권해도 지금처럼 함부로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박근혜 탄핵 평가 운운은 아직 정신을 못 차렸다는 얘기다. 그 문제는 야당이 살아남은 이후의 숙제다. 야당이 새로운 모습으로 새 비전을 실천하며 국민의 밑바닥을 파고들어 신뢰를 회복한 연후에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지금 중요한 건 국민에게 어떤 정당으로 새롭게 출범할 것인가에 대한 비전, 여당과 청와대를 향해 할 말은 하면서 투쟁과 협상을 병행하는 정치적 노련미를 보여주는 일이다. 무엇보다 파산을 각오한 채 ‘죽어야 산다’는 절대 명제를 뼛속까지 새겨 실천해야 한다. 그래야 당도 살고 대한민국이 산다.”
—새해를 맞이하면서 한국 사회를 이끄는 지도자의 마음가짐을 짚어본다면?
“지난 100년을 뒤돌아보면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치고 피 흘렸던 사람들은 부귀영화를 추구하지 않았다. 김구 선생의 표현을 빌리자면, 독립된 나라 청사의 문지기나 청소부가 되기를 청했다. 피 끓는 애국심으로 나라에 헌신했던 사람들이다.
앞으로의 100년, 새로운 세기는 당시 선조들과는 다른 차원의 헌신이 요구된다. 더 복잡하게 얽힌 갈등, 분열을 극복해야 하는 숙제가 가로놓여 있다. 국제사회는 국제사회대로 치열한 경쟁과 다국적‧다차원의 협력‧협조가 전개될 것이다. 국가 관계도 변할 것이다. 힘이 없는 나라는 소멸하거나 주권국 행세를 못하게 될 것이다. 힘이 있어야 나라가 있고 평화가 유지된다는 교훈을 되새겨야 할 때다.”
■ 평화를 지키는 힘은 국가 안보와 외교력
—그 힘은 무엇인가?
“첫째는 국가 안보다. 외국으로 쳐들어가서는 안 되지만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킬 튼튼한 국방력이 있어야 한다. 국방력은 군사력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국민의 국가 수호 의지도 중요하다. 그 다음은 외교력이다. 대한민국같이 열강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곳일수록 탁월한 외교력을 발휘해야 존립할 수 있다. 유감스럽게도 현재 그런 사람이 안 보이는 것 같다. 무엇보다도 국가 안보와 외교의 중요성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정부와 국회를 이끄는 것 같아 걱정이다.”
—적폐 청산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정치가 국민에게 희망을 주려면 정치 참여자들이 어떤 자세로 정치에 임해야 할까?
“중국 춘추전국 시대 공자(孔子)의 제자 자공(子貢)이 평생토록 가슴에 지녀야 할 한 마디가 뭐냐고 물었다. 공자는 ‘그것은 용서할 서(恕)’라고 했다. 이 글자는 같을 여(如) 밑에 마음 심(心)이 붙어 있는 모양새다. ‘마음을 같이 한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내가 상대방의 마음으로 이해할 때 진정한 용서를 할 수 있다는 뜻일 것이다. 기독교에서 중시하는 ‘긍휼(矜恤)’도 Compassion이라는 영어 단어로 표기된다. ‘com’은 ‘같이’라는 뜻이고, ‘passion’은 ‘아픔’을 일컫는다. 상대방과 아픔을 함께 한다는 뜻 아니겠는가. 불교의 자비(慈悲)도 무한히 사랑하는 마음(慈)과 무한히 슬퍼하는 마음(悲)의 하나 됨이다. 2019년 새해 정치인들이 지향해야 할 마음가짐이 용서고 화해다. 그런데 우리 정치와 사회는 지금 용서할 서(恕) 대신에 분노할 노(怒)가 판을 치는 형국이다.”
—대한민국의 지도자가 갖춰야 할 덕목을 꼽는다면?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민주주의를 이끈 페리클레스는 지도자의 자질로 지혜‧설득력‧애국심‧도덕성 네 가지를 들었다. 2500년 전 한낱 도시 국가에 불과한 아테네의 지도자가 이 네 가지 가치를 받들었는데 5000만, 6000만 명의 대한민국을 이끌 지도자라면 응당 이런 덕목은 갖춰야 마땅하다. 그런데 국민들은 이 네 가지 기본 자질을 우리 정치 지도자들이 구비했다고 생각할까?”
—해외의 어떤 지도자는 내우외환(內憂外患, 내부에서 일어나는 근심과 외부로부터 받는 근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얘기한 적이 있다. 눈에 보이는 외환보다 안 보이는 내우가 더 무섭고 치명적이라고. 그 현실을 직시할 용기가 없기에 국가와 국민을 파멸 속에 빠뜨린다는 취지다. 대한민국에는 이런 치명적인 ‘내우’가 없을까?
“갈등지향적이고 분열과 대립이 격렬한 가운데 새해를 맞이했다. 맹자는 ‘사람은 반드시 스스로를 업신여긴 후에 남들이 업신여기며, 나라는 반드시 그 나라를 스스로 친 뒤에야 남들이 친다(夫人必自侮 然後人侮之, 國必自伐 而後人伐之)’고 통찰했다. 국가의 생명은 유한하고 영속적이지 않다. 20세기 들어 100개 이상의 나라가 생기고 50개 넘는 나라가 소멸했다. 우리의 역사를 되돌아봐도 고구려‧백제‧신라‧고려‧조선 등이 탄생하고 망했다. 대한민국도 이제 정부 수립 70년인데 앞으로 30년을 더 버틸 수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이 나라를 우리가 소중하게 가꾸지 않고 스스로 관리를 못하면 남들이 업신여기고 해친다는 교훈을 명심해야 한다.
새해는 나라의 소중함을 깨우치는 한 해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라가 나를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을 것인지 묻지 말고, 내가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할지 먼저 고민하라던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취임사를 유념할 때다.”
—끝으로 <월간중앙> 독자들에게 새해를 맞는 소감 한 말씀….
“덕담이라기보다는 고언이 되겠다. 기원전 7세기 부자와 빈자의 갈등이 심각한 아테네에 현인 솔론이 등장하여 개혁을 단행했다. 처음엔 열렬히 환영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부자와 빈자는 자기에게 불리한 정책에 대해 반대하고 솔론을 비방했다. 결국 솔론은 그리스를 떠나 10년간 유랑했고 개혁도 중단됐다. 모든 사람이 우러러 받드는 그리스의 현인도 모두를 만족시키는 개혁의 답안을 마련하지 못했다. 그러나 솔론 같은 사람이 있었기에 그리스와 아테네는 민주주의가 유지되고 개혁의 등불이 꺼지지 않았다. 진영논리와 기득권, 집단 이기주의가 팽배한 사회에서 개혁은 부자‧빈자의 갈등 이상으로 힘들고 어렵다. 자기를 버리고 지지자들로부터 서운한 소리를 듣더라도 옳은 길, 미래를 위한 길에 자기를 헌신하는 사람이 참 지도자다. 2019년 새해엔 이런 사람이 도처에서 많이 나타나기를 기대해 본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