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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06 한겨레신문] 보수 정치인이 은퇴 이후 멋지게 사는 법

 

정치 막전막후 283
김형오 전 국회의장 기증 자료 특별전 성황
국회도서관 1층 중앙홀서 9월17일까지 전시
“유한한 정치 인생보다 훨씬 긴 자기 인생이 있다”
“오늘 나의 행적이 뒷날 다른 사람 이정표 될 것”

 

김형오 전 국회의장, 문희상 국회의장, 이주영 국회부의장 등이 5일 국회도서관 1층 중앙홀에서 열린 ’김형오 전 국회의장 기증 자료 특별전’에서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형오 전 국회의장(72)은 1992년 부산 영도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돼 2012년까지 20년 동안 내리 5선을 했습니다.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08년부터 2010년까지 18대 국회 전반기 국회의장을 지냈습니다.


김형오 전 국회의장은 국회의원을 오래 한 정치인이 으레 그렇듯이 의회주의자입니다. 2008년 7월 국회 개원사를 하면서 “정치의 시작도 끝도 그리고 그 중심도 국회가 되도록 합시다”라고 했습니다. 국회의장을 지낸 사람은 다음 총선에 출마하지 않는 관례에 따라 19대 총선에 출마하지 않고 정계에서 은퇴했습니다.

 

김형오 전 의장은 학구적인 사람입니다. 인문학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가 좋아하는 사자성어가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다”는 의미를 담은 수불석권(手不釋卷)입니다.


그는 정계에서 은퇴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2012년 <술탄과 황제>라는 베스트 셀러 저자로 이름을 알렸습니다. 오스만 술탄과 비잔틴 황제 두 지도자의 리더십을 탐구해서 쓴 역작입니다. 만화로도 출판됐습니다.


2016년에는 <누구를 위한 나라인가>를 출판했고, 2018년에는 <백범 묻다 김구 답하다>를 출판했습니다. 그는 현재 ‘백범 김구 선생 기념사업협회’ 회장입니다.

 

김형오 전 의장은 정계 은퇴 이후 한나라당과 새누리당 당적을 갖고 있었고 상임고문도 지냈습니다. 그러나 2016년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당시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 공천 파동을 보고 조용히 탈당계를 냈습니다. 그 이후 당적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조용히 지내던 김형오 전 의장은 지난 8월 27일 자유한국당 국회의원 연찬회에서 ‘자유한국당의 진로’라는 제목의 특강을 했습니다. 대략 이런 내용입니다.


“총선 불출마 선언 , 험지 출마의 죽을 길을 택하라 . 지금은 죽기에 딱 좋은 계절이다 .
여러분은 다 죄가 많다 . 탄핵 동참이라는 , 어리석은 동참을 해서 이 꼴이 됐다 . (당을 ) 안 나갔던 사람도 큰소리치지 말라 . 막지도 못했다 . 다 똑같은 책임인데 누가 누구를 나무라겠나 .
을사늑약과 탄핵을 비교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당시는 자결 시도로 죽음을 불사하고 투쟁했다 . 여러분은 혜택을 많이 입은 사람 아니냐 . 자결하라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의원직 사퇴 하나 없는 자유한국당이다 .
초 ·재선 의원들은 개혁 모임도 없고 , 당 진로에 쓴소리 한마디 없다 . 지금 이대로라면 초 ·재선 , 중진 중에 당선될 사람이 있나 . 꿈이 있는 사람이여 , 총선 불출마 선언 , 험지 출마의 죽을 길을 택하라 .”



김형오 전 의장의 독한 발언에 자유한국당 의원 가운데 일부는 “자기는 현역 때 얼마나 잘했다고 저러냐”고 반발했습니다. 그러나 이른바 보수를 걱정하는 대부분의 사람은 김형오 전 의장의 자유한국당 비판에 공감했습니다. 대부분의 언론이 그의 발언을 비중 있게 보도했습니다.


그랬던 김형오 전 의장이 자신의 의정활동 자료, 도서, 국회의장 재임 시절 받은 선물을 국회에 기증하면서 또다시 화제에 올랐습니다.

 

 

9월 5일 오후 2시 김형오 전 국회의장 기증 자료 특별전이 국회도서관 1층 중앙홀에서 열렸습니다. 문희상 국회의장, 이주영 국회부의장, 유인태 국회 사무총장 등 수백명이 참석해 성황을 이뤘습니다.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 나경원 원내대표도 참석했습니다.


국회에 책과 자료를 기증한 정치인이 김형오 전 국회의장이 처음은 아닙니다. 이종찬 현경대 전 의원이 의정활동 기록과 책을 국회에 기증해 지난해 특별전을 했고, 지난 6월 김종필 전 의원이 3천권의 책과 문서·사진 수천점을 기증해 분류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문희상 국회의장은 현직 국회의장인데도 지난해 6월부터 의정활동 자료를 매달 국회도서관에 넘기고 있습니다.


정치인들이 갖고 있던 자료와 국회도서관이 소장한 책을 디지털화하는 작업에는 상당한 예산이 들어갑니다. 국회도서관 원문 데이터 구축 예산이 지난해 18억원에서 올해는 76억원으로 늘었고, 내년에는 150억원으로 늘어날 예정입니다.


김형오 전 국회의장은 이번에 자신이 갖고 있던 책 가운데 2074권, 기록물 5천여점, 그리고 국회의장 재직 시절 정상외교를 하면서 받은 선물 178점을 기증했습니다. 국회도서관은 2000권 이상 책을 기증받는 경우 그 사람의 이름을 붙여서 영구 보관하고 있습니다. 국회도서관에 ‘김형오 문고’가 생기는 것입니다.


김형오 전 국회의장이 자신이 가진 책을 모두 다 기증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자신이 국회의장 시절 받은 선물은 이번에 모두 다 기증했지만, 책은 다 기증하지 않았습니다. 앞으로도 책을 더 읽고 글을 더 써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문희상 국회의장에게 감사패를 전달받은 뒤 짤막한 답사를 했습니다. 자신이 <술탄과 황제>를 쓸 때 하루에 4시간 밖에 잠을 자지 못해서 건강을 해쳤다는 일화를 소개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술탄과 황제>에 그렇게까지 공을 들인 두 가지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첫째, 책을 엉성하게 쓰면 국회의장까지 지낸 사람이 무슨 책을 이렇게 썼느냐고 비판받을까 봐 걱정했다고 했습니다. 둘째, 국회의원들에게 유한한 정치 인생보다 훨씬 더 긴 ‘자기 인생’이 있다는 것을 깨우쳐주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두 번째 이유를 설명할 때 ‘울림’이 있었습니다. 김형오 전 의장은 후배 국회의원들이 너무 ‘위’만 바라보며 정치를 하고 있다고 걱정하며, ‘위’가 아니라 ‘국민’을 바라보는 정치를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또 후배 국회의원들에게 “언제나 ‘대안’(alternative)이 있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싶다고 했습니다.


답사를 마치며 김형오 전 의장은 백범이 애송했던 한시를 소개하고 해설했습니다.

 


답설야중거   踏雪野中去
불수호난행   不須胡亂行
금일아행적   今日我行跡
수작후인정   遂作後人程


눈 내리는 벌판 한가운데를 걸을 때라도
어지럽게 걷지 마라
오늘 걸어간 이 발자국들이
뒤따라오는 사람들에게 이정표가 되리니



김형오 전 국회의장의 답사에 국회도서관 1층에 모인 청중은 힘찬 박수로 화답했습니다.
우리나라 정치인 중에 은퇴 이후 아름다운 뒷모습을 보이는 사람을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정치인이 은퇴 이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배우려면 김형오 전 국회의장의 사례를 잘 살펴봐야 할 것 같습니다.


김형오 전 국회의장 기증 자료 특별전은 9월 17일까지 계속됩니다. 국회도서관 1층 중앙홀에 오면 김형오 전 의장이 소장했던 책과 의정 자료, 그리고 2009년 주한 인도 대사로부터 받은 인도코끼리 모형, 2009년 터키 에르도안 총리에게 받은 금속 보석함 등 의회 정상외교 선물을 볼 수 있습니다.

 

 

성한용 선임기자 shy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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