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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16 위키리크스] [WIKI 초대석] 김형오 前 국회의장 "포퓰리즘 정권, 문제가 심각하다"

"정치판, '물갈이' 하랬더니 물고기만 갈아"

"원로와 중진들, 정치발전 '불쏘시개' 돼야"

"젊은이들, 세상을 바꾸려면 지금이 기회"

 

김형오 전 국회의장은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통령들의 정치인생이 모두 비극으로 막을 내렸다. 이 모든 비극의 근본적인 뿌리는 '5년 단임 제왕적 대통령제'에 있다"고 지적했다. [사진=위키리크스한국]

 

 

"우리는 시스템도 미흡하고 민주주의 교육도 잘 안 돼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포퓰리스트 정권은 더욱 위험합니다."

 

"물갈이 대신 '판 갈이'를 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구조를 바꿔야 한다는 말입니다. 구조를 바꾸려면 첫째가 개헌이고, 둘째가 정당법과 국회법, 정치자금법 같은 정치관계법을 바꾸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이 북····'오면초가(五面楚歌)'에 처해 있다는 말이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다.

 

북한은 올해 들어 열 차례 신형 무기를 시험 발사했다. 그 어느 때보다 군사정보 공유가 중요한 시점에 우리 정부는 '국익을 위해' 일본과의 지소미아를 폐기하기로 했다. 일본의 '화이트리스트 배제' 조치에 대한 보복 차원에서다.

 

한일 갈등은 우리 대법원의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판결에 따른 단순한 과거사 갈등이 아니다. 경제와 외교·안보까지 걷잡을 수 없이 갈등이 확산하고 있을 뿐 아니라 '한미일 삼각협력', 나아가 '한미 동맹'의 축까지 흔들고 있다.

 

<위키리크스한국>은 이러한 총체적 난국의 본질적 원인을 자유민주주의 발전에 따른 사회의 다양성을 외면하는 정치적 후진성과 운동권 출신 인사들의 집단 이기주의라고 진단했다.

 

지금 청와대와 여당을 장악한 운동권 출신 인사들은 과거사에 집착하며 그들이 정의(定義)하는 '더 큰 정의(正義)', 그리고 그들이 몸담은 조직의 이익을 위해 '사소한 정의'를 외면하며 자신들의 부정(不正)을 합리화하는 집단주의 성향을 보이고 있다.

 

1야당인 자유한국당 역시 존재 가치를 위협받고 있다. 지역감정과 종북론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시대가 요구하는 방향성과 투쟁력을 상실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난세에 영웅이 나타난다고 했으나 지식인과 정치 원로 등 사회 지도층은 현실을 외면하거나 현실감 없는 진단을 하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지난달 자유한국당 국회의원 연찬회에서 쓴소리를 한 김형오 전 국회의장의 발언은 주목할 만하다.

 

당시 그는 자유한국당 의원들에게 "정부와 여당, 특히 청와대의 독주독선을 막으려 몸을 던졌는가"라고 질책하며 "여당의 실정(失政)이 아니라면 한국당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 당이었을지도 모른다. 안보는 625 이후 최고로 취약하고, 경제는 IMF 이후 최대 위기이며, 외교는 1965년 이후 최악의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당이 살고 자유민주주의가 살기 위해 몸을 던져야 한다""장엄하게 몸을 던져 죽으라"고 말했다.

 

<위키리크스한국>은 합리적인 보수의 상징이자 존경받는 정치 원로인 김형오 전 국회의장을 최근 서울 강남의 한 커피숍에서 만났다.

 

김 전 의장은 나라를 위해 치열하게 희생한 운동권의 정치 참여는 환영하면서도 '곁다리 운동권 출신'들의 정치 참여는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봤다.

 

김 전 의장은 "운동권에 곁다리를 걸치며 어슬렁거렸던 인물들이 하루아침에 높은 자리에 오르고 또 어떤 이는 국회의원 배지를 단다""이런 '곁다리 운동권 출신'들은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바친 동료들에 대한 존중과 애국심 없이 과실을 따 먹기만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민주주의를 위해 피 흘렸던 동료를 대신해 그 자리에 올랐으면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위해 봉사하고 희생해야 할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김 전 의장은 '곁다리 운동권' 출신이 장악한 진보정권의 정치적 조작(political manipulation)을 경계했다.

 

그는 "옛날에는 '깨끗하지만 경험이 없는 진보', '능력은 있지만 부패한 보수'라고 했는데 지금의 진보는 깨끗하지도 못하고 능력도 없다""깨끗하지도 않고 능력은 없는데 정치적인 조작은 아주 뛰어나다고 비판했다.

 

이어 "'국가 경영'에 대한 책임감과 소명의식을 보기 힘들다. 모든 게 제대로 돌아가지 않으니 외부에 적을 만들어 내부 지지기반을 공고히 하려고 한다"고 덧붙였다.

 

김 전 의장은 "편 가르기 하면서 진영논리만 주장하면 되니 참 편리하다. '진영'이라는 버스에 오르기만 하면 운전하는 수고 없이 목적지까지 갈 수 있다""요즘 진보와 보수로 편을 가르는 사람들은 진영논리에 의존하며 기득권에 안주하는 집단 이기주의의 화신"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김 전 의장은 세계에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포퓰리즘이 우리나라에는 더욱 위협적이라고 우려했다. 유럽 국가나 미국과 달리 국가 시스템도 민주주의 교육도 미흡한 우리나라에서 그 해악이 더욱 크기 때문이다.

 

그는 "유럽과 미국 시민들은 오랫동안 민주주의 교육을 받아왔다. 민주주의를 해칠 정도로 포퓰리즘을 받아들이지 않는 국민 정서가 있다""의회 민주주의가 발달한 유럽 국가들은 의원 내각제를 채택하고 있어 의회와 정부 간 견제와 균형이 잘 이뤄진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 국민들은 정치적 조작에 감정 이입을 잘한다. 성격이 너무 급하고 너무 쉽게 열광한다. 누군가를 하루아침에 '영웅'으로 만들어 버리기도 한다"면서 "국민들은 분위기에 휩쓸리지 말고 차분하게 판단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김 전 의장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개헌'을 제시했다. 개헌은 그의 18대 국회의장 취임 일성이기도 했고, 그가 30여 년 정치인생에서 가장 아쉬운 점으로 꼽는 부분이기도 하다.

 

김 전 의장은 총선을 약 7개월 앞둔 현재 '물갈이' 대신 '판 갈이'를 강조했다. 물갈이라는 말이 물이 아닌 사람을 바꾸는 것이 됐으니 '판 갈이'를 하자는 것이다. 그는 "다시 말해 구조를 바꿔야 한다는 말"이라며 "구조를 바꾸려면 첫째가 개헌이고, 둘째가 정당법과 국회법, 정치자금법 같은 정치관계법을 바꾸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김 전 의장은 정치 원로들과 중진들이 정치발전을 위한 '불쏘시개'가 돼야 한다고 제언했다. 그는 "여야 어느 진영에 속하건, 나 같은 사람들, 다시 말하면 나라와 국민으로부터 큰 은혜를 입은 사람들은 이제 무엇을 더하고자 해서는 안 된다. 현직의, 이른바 정치권의 원로·중진들은 자기가 중심적 위치에 있어야 하고, 킹은 아니어도 킹메이커가 되겠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잘 먹고 잘살고 잘 대접받았으니 이 나라 정치발전을 위한 불쏘시개가 되겠다고 해야 한다""특히 편안한 지역구에서 쉽게 당선된 의원들은 더 그래야 한다"고 덧붙였다.

 

김 전 의장은 젊은이들의 적극적인 역할도 당부했다. 그는 "정치를 꿈꾸는 젊은이들이 세상을 바꾸려면 지금이 기회다. 조금은 모자라고 조금은 서툴더라도 순수한 열정과 애국심으로 스스로를 무장해 달려나가야 한다.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위해 떨쳐 일어날 때가 바로 지금"이라고 말했다.

 

김 전 의장은 '사회 정풍운동 또는 정치개혁 운동에 앞장설 의향이 있느냐'는 질문에 "수없이 얘기했지만 듣지 않는 것 같다"1905년 을사늑약 체결 당시 백범 김구 선생의 일화로 대답을 갈음했다.

 

김 전 의장에 따르면 당시 민영환 공이 자결하고 이상설 참판이 자결을 시도했지만, 김구 선생을 비롯한 청년 지도자들은 죽기를 무릅쓰고 항의시위를 하다가 마침내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당시 민중의 의식과 수준으로는 안 된다'는 판단에서였다. 김구 선생은 이후 각지를 돌며 애국 계몽운동을 열심히 하고 민중을 가르치며 문맹 퇴치에 힘썼다.

 

김 전 의장은 "죽음은 두렵지 않지만 죽음이 나라를 되찾는 데 효과가 있는 방법이 아니었다는 것"이라며 "나라를 위해 교육이 그만큼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김형오 전 국회의장은 경남 고성 출신으로 경남고와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한 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정치학 석사학위, 경남대학교 대학원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김 전 의장은 동아일보 기자로 재직하다 1978년 외교안보연구원에 들어가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14~18대 국회의원과 한나라당 원내대표를 지내고 18대 국회의장에 오른 뒤 정계를 은퇴했다. 2013년부터 올해까지 부산대 석좌교수를 역임했으며 2015년부터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장을 맡고 있다.

 

김 전 의장은 "'곁다리 운동권 출신'들은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바친 동료들에 대한 존중과 애국심 없이 과실을 따 먹기만 한다"며 "민주주의를 위해 피 흘렸던 동료를 대신해 그 자리에 올랐으면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위해 봉사하고 희생해야 할 것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사진=위키리크스한국]

 

다음은 김형오 전 의장과의 일문일답.

 

▶의장님의 정치인생에서 가장 보람된 점을 무엇으로 꼽으시겠습니까?

 

"'돈을 벌어오는 국회'를 만들었던 것이 기억에 남습니다. 20015월 미국 퀄컴으로부터 코드분할다중접속(CDMA) 특허권 기술료로 2억 달러가 넘는 돈을 받아냈습니다. 당시 환율로 계산하면 3천억원 가까이 되는 엄청난 돈이었죠.

 

1995년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은 퀄컴의 CDMA 원천기술을 세계 최초로 상용화했습니다. 원천기술 로열티는 퀄컴이, 상용화 로열티는 우리가 받는 것이지요. 그런데 퀄컴은 받을 것만 받고 우리에게는 단 한 푼도 내놓지 않았어요.

 

그래서 제가 1997년도 국정감사에서 이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퀄컴 CEO에게 편지를 보내고 국회 대책반을 구성해 퀄컴 본사에 항의 방문했습니다. 미온적인 정부와 ETRI를 압박해 3년간 중재재판을 해서 결국 이겼습니다. 기술료 배분액 1255530달러를 즉시 받고, 이후 순차적으로 받은 것이 1억 달러를 훨씬 넘었으니 총 2억 달러가 넘는 돈을 받았죠.

 

당시 언론으로부터 '의정 활동으로 돈을 벌어 온 유일한 국회의원'이라는 찬사를 받았습니다."

 

▶국익에 엄청난 기여를 하셨는데 당시 정부의 반응은 어땠나요?

 

"이렇게 국익을 위해 돈을 벌어와 '돈을 벌어오는 국회'를 만들었지만 야당이라 그랬는지 훈장도 표창도 받지 못했습니다.

 

'공무수행 중에 한 일에 대해서는 보상하지 않는다'는 규정이 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퀄컴으로부터 기술료 배분액을 받아낸 것은 통상적인 공무수행은 아닙니다. 아무도 인식하지 못했던 문제를 찾아내 보좌관과 밤을 새우다시피 해 계약서를 꼼꼼히 검토하며 준비했으니까요.

 

수출을 5천만 달러 이상 하면 상(5천만 불 수출탑)도 주고 훈장(철탑산업훈장)을 줍니다. 하다못해 길거리에서 지갑을 주워 파출소에 신고하면 지갑 주인이 사례금으로 주운 돈의 10%를 주는 관례가 있어요.

 

국익을 위해 2억 달러가 넘는 돈을 벌어왔는데 저는 단돈 10원도 받지 않았습니다. 그 돈은 모두 국고로 들어갔고 해당 공직자와 연구관계자들은 그 보상금으로 '잔치'를 벌였어요.

 

포상금을 받겠다는 생각은 아예 없었으니 서운하지 않지만 그때 제가 야당이라 그랬는지 훈장 하나 안 준 것은 조금 서운했어요.

 

국민들은 '국회' 하면 '싸움하는 국회'를 연상하지만, 국회가 국익을 위해 돈을 벌어오기도 했고, 그렇게 했음에도 돈 한 푼 받지 않았다는 걸 국민들에게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얼마나 자랑스럽습니까?"

 

▶정치인생에서 가장 아쉬운 점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개헌을 하지 못했던 것이 가장 큰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제 국회의장 취임 일성이 개헌이었습니다. 청와대에서 그리고 총리실에서 정권이 명멸하는 과정을 쭉 봤으니 권력이 냉혹하면서도 허무하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통령들의 정치인생이 모두 비극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이 모든 비극의 근본적인 뿌리는 '5년 단임 제왕적 대통령제'에 있다는 것을 간파했어요. 우리 역사에서 다시는 불행한 대통령이 나오지 않아야 한다는 뜻에서 취임 일성으로 개헌을 강조했어요. 개헌을 하지 않으면 나라가 잘될 수 없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역대 대통령들은 대선에 출마할 때는 개헌을 하겠다고 해놓고 당선되면 마음을 바꿉니다. 그 결과 계속해서 불행한 대통령이 나왔죠. 그러나 개헌을 하지 않으면 불행해집니다. 문재인 대통령 역시 개헌을 하겠다고 해놓고서 하지 않고 있죠. 박근혜 전 대통령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의장님께서는 그때 대선과 국회의원 선거가 겹치는 2012년이 개헌의 적기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이 시기를 놓치면 2032년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하셨는데, 그 시기는 이미 지나가 버렸습니다. 2032년까지 기다려야 할까요? 현재 우리가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지금이라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대통령 권한이 너무 강하니까 대통령들이 스스로 그 권한을 내려놓지 않으려고 하죠. 적기를 놓치기는 했지만, 개헌은 이제 시기가 아닌 의지의 문제가 됐습니다. 의지만 있으면 개헌을 할 수 있어요.

 

지금 여권에서는 '이상한 개헌'을 하려고 합니다. 매우 나쁜 생각이에요. 개헌의 핵심은 대통령의 막강한 권한을 줄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단은 그대로 두고 헌법에 명시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서 '자유'를 뺀 '민주적 기본질서'로 수정하겠다, 토지 공개념을 강화하겠다고 합니다. 이상한 개헌을 하려고 하니 불안합니다."

 

▶일부 386 운동권 출신들의 정치 행위를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기득권을 비판했던 운동권 인사들은 ‘강남좌파’ 혹은 ‘진보귀족’이라고 불리는 또 다른 기득권이 됐습니다.

 

"운동권의 정치 참여 그 자체는 좋습니다. 사회인들보다 더 열심히 노력하고 국가를 위해 희생한 운동권 인사들의 정치 참여라면 좋지요. 나라를 위해 치열하게 희생한 유명한 운동권 인사들도 분명 존재했습니다.

 

그런데 운동권에 곁다리를 걸치며 어슬렁거렸던 인물들이 하루아침에 높은 자리에 오르고 또 어떤 이는 국회의원 배지를 답니다. 열심히 공부해 공무원이 되고 또 10년 넘게 열심히 노력해서 올라갔더니 운동권 출신들이 갑자기 상전이 돼 나타나 '갑질'을 합니다.

 

이런 '곁다리 운동권 출신'들은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바친 동료들에 대한 존중과 애국심 없이 과실을 따 먹기만 합니다. 민주주의를 위해 피 흘렸던 동료를 대신해 그 자리에 올랐으면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위해 봉사하고 희생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4.19혁명 기념일이나 5.18 민주화운동 추모일이 되면 '잊지 않겠다'고 아주 정중한 목소리로 말하고 나면 끝입니다. 치열한 삶을 살지 않은 사람이 국민의 행복과 안정을 위해 치열하게 노력하겠습니까?"

 

▶ 한국 진보진영의 현실을 진단해주셨으면 합니다.

 

"옛날에는 '깨끗하지만 경험이 없는 진보', '능력은 있지만 부패한 보수'라고 했는데 지금의 진보는 깨끗하지도 못하고 능력도 없습니다. 지금의 진보는 진보와 보수가 가진 나쁜 점()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진보 정권과 진보 정부가 아니라 오히려 '보수 꼴통'에 가깝죠. 깨끗하지도 않고 능력은 없는데 정치적인 조작(political manipulation)은 아주 뛰어납니다.

 

국민들이 이들의 정치적 조작에 감정 이입을 잘한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성격이 너무 급해요. 너무 쉽게 열광합니다. 누군가를 하루아침에 '만고역적'으로 만들었다가, 또 하루아침에 '천하영웅'으로 만들어 버리기도 하죠. 우리 국민들도 분위기에 휩쓸리지 말고 차분하게 판단해야 합니다.

 

물론 정치적 조작과 선동은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2010년대에 들어 포퓰리스트 정권과 포퓰리즘이 세계적으로 횡행하고 있어요.

 

세계의 위기이자 지도자의 위기입니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중국의 시진핑 국가주석, 일본의 아베 신조 총리, 영국의 보리스 존슨 총리 등 각국에 이상한 지도자들이 들어섰습니다. 이 지도자들은 이웃 나라가 어떻게 되든, 세계가 어떻게 되든 관심이 없습니다. 좋게 말해서 '자국 중심주의'지 세계 공동체 의식 없이 필요에 따라 말을 바꾸고 때로는 선동을 일삼고 있습니다. 그래도 유럽과 미국이 우리나라보다는 낫습니다."

 

▶우리나라가 포퓰리스트들의 선동에 더 취약하다는 말씀으로 이해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첫째, 유럽과 미국 시민들은 오랫동안 민주주의 교육을 받아왔습니다. 민주주의를 해칠 정도로 포퓰리즘을 받아들이지 않는 국민 정서가 있습니다.

 

둘째, 역할 분담과 견제와 균형을 위한 시스템과 제도가 잘 갖춰져 있습니다. 의회 민주주의가 발달한 유럽 국가들은 의원 내각제를 채택하고 있어 의회와 정부 간의 견제와 균형이 잘 이뤄집니다. 다시 말해, 유럽과 미국은 시스템도 갖춰져 있고 국민들도 깨어 있어요.

 

우리는 시스템도 미흡하고 민주주의 교육도 잘 안 돼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포퓰리스트 정권은 더욱 위험합니다.

 

현재 '복지 포퓰리즘'이라는 무책임한 선동이 횡행하고 있습니다. 복지체계가 가장 잘 갖춰졌다고 하는 북유럽국가들은 세금을 많이 징수하기로도 유명합니다. 우리나라의 세율은 유럽보다 훨씬 낮습니다. 복지를 늘리려면 세금을 더 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정부는 대기업으로부터 세금을 더 많이 징수하면 된다는 식이에요. 우리나라에서 세계적인 대기업으로 꼽힐 만한 기업은 한두 군데뿐입니다. 기업을 무조건 옹호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세계적인 경쟁력을 가져야 이 나라 산업이 튼튼해지고 과학기술 경쟁력도 올라가고, 국민들도 혜택을 받는 것 아니겠습니까."

 

▶한일 갈등이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달 긴급 국무회의에서 "우리는 다시는 일본에 지지 않겠다"고 강조했습니다. 정부의 대응에 대해 어떻게 보십니까?

 

"국가 시스템이 미흡합니다. '국가 경영'에 대한 책임감과 소명의식을 보기 힘들어요. 모든 게 제대로 돌아가지 않으니 외부에 적을 만들어 내부 지지기반을 공고히 하려고 합니다.

 

'사법자제의 원칙'은 거의 모든 선진국에서 확립된 관행입니다. '사법자제의 원칙'에 따라 대외관계를 고려해 판단을 유보하든지 판단을 하더라도 외국에 영향을 미치지 않게끔 해야 했습니다. 그게 바로 정부의 존재 이유인데 '토착왜구''친일파 후손'이니 선동하고 있습니다. 참 무책임하죠.

 

현 정부는 과거 대법원이 강제징용 판결과 관련해 외교부와 상의한 것을 '재판거래'로 규정하며 사법부 지도부를 교체했습니다. 그렇게 교체된 사법부가 어떤 판결을 내리겠습니까? 새 사법부는 '한일 청구권협정이 발효됐지만 피해자 개인의 청구권은 살아 있다'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일본에 3억원을 배상하라고 했는데, 지금 돈이 문제가 아닙니다. 한일 관계가 극단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이렇게 될 게 너무나도 뻔했는데 7~8개월간 손을 놓고 있다가 아베 총리가 반응하니까 '아베 몰아치기'에 나서고 있습니다.

 

친일파니 토착왜구니 몰아붙이는 사람들이 바로 친일파이고 토착왜구입니다. 일본 입장, 특히 아베 지지율을 올려주고 있지 않습니까! 일제 상품 불매 운동을 한다면 삼성 텔레비전도, LG 냉장고도 사면 안 됩니다. 일본산 부품이 안 들어가 있는 국산 텔레비전이나 전자제품이 있습니까? 일본이 화이트리스트에서 한국을 배제해 포토레지스트와 불화수소,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등 반도체·디스플레이 소재 3개 품목 수입이 까다로워졌습니다.

 

정부는 국내 대기업들이 소재부품 국산화와 자립화를 하지 않았다고 비판합니다. 그러면서 소재·부품·장비 산업 육성을 위해 1조원을 투자하겠다고 합니다. 국제분업과 비교우위, 세계 무역이 무엇인지 고등학교 1학년만 되도 다 아는 마당에 가당치도 않은 구상입니다. 여자 골프선수에게 '지금 세계적으로 잘 나가는 여자 골프선수가 너무 많으니 여자 축구선수가 돼 여자 월드컵에 출전하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소재·부품·장비 산업은 매우 중대합니다. 이런 산업을 제대로 육성하려면 규제를 풀고 공정거래가 이뤄질 수 있는 풍토를 조성해야 합니다. 정부가 할 일은 안 하고 딴 일만 하는 사이에 선진국은 멀리 달아나고, 중국 등이 바짝 따라오고 있지 않습니까.

 

모든 것이 상호 연결된 시대에서 국산 부품으로만 반도체를 만드는 게 가능한 일일까요? 골프채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헤드는 대만산, 샤프트는 한국산, 그립은 일본산이고 디자인은 미국에서 했지만 최종적으로 '메이드 인 저팬(made in Japan)'이 되기도 하고 메이드 인 유에스에이(made in U.S.A.)가 되기도 합니다. 정부가 세계 경제를 몰라도 너무 모릅니다."

 

김 전 의장은 고기만 바꾸는 '물갈이' 대신 '판 갈이'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구조를 바꾸려면 첫째가 개헌이고, 둘째가 정당법과 국회법, 정치자금법 같은 정치관계법을 바꾸는 것"이라고 말했다. [사진=위키리크스한국]

 

▶내년 총선까지 약 7개월 앞둔 현재 자유한국당 지도부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요?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감을 회복해야 합니다. 지금 패배주의와 냉소주의가 만연하는 듯한 분위기입니다. 행동하지 않으려면 지금이라도 의원직을 내던져야 하고, 의원직을 지키려면 앞장서야 합니다. 방법론으로 날을 지새워도 안 됩니다. 전통적 방법은 전통적 방법대로, 새로운 방법은 새로운 방법대로 다 활용가치가 있습니다.

 

문제는 똘똘 뭉치지 못하고, 형식적인 보여주기식 투쟁을 한다는 것입니다. 지도부가 말이 아닌 행동으로 모범을 보이고 그다음으로 소극적인 의원에 대해서는 단호함도 보여야 합니다. 지도부도 의원들도 어정쩡한 모습으로 있는데 지지율이 오르고 기대와 희망을 갖겠습니까.

 

자유한국당의 투쟁이 먹히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치열함이 부족해서입니다. 보수 정치인들은 치열하고 진지하게,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보여주기 용'이라는 의도가 읽히는 순간 국민들은 외면합니다."

 

▶보수의 가치도 개혁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기도 합니다. 한국 보수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 주셨으면 합니다.

 

"시대정신을 잘 아울러 미래로 나아가야 합니다. 보수의 가치는 수호해야 할 가치이고, 수호해야 할 가치를 위해 목숨을 던지는 것이 보수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제대로 된 진보도 제대로 된 보수도 없어요. '이른바 진보''이른바 보수'만 있을 뿐이죠. 우리나라 기득권층은 보수와 진보를 떠나 자기가 갖고 있는 권리 지분을 놓치지 않으려고 합니다.

 

보수 정권은 진보 정권에 의해 깨졌습니다. 진보는 '용어 제조사'가 돼 기득권을 지키려고 합니다. 용어를 만들어내는 데 일가견이 있어요. '정의', '공정', '적폐청산'을 외치며 재미를 보다가 이제 식상하니까 '개혁' 혹은 '혁신'으로 말을 분장합니다. 별로 설득력이 없습니다.

 

우리 정치의 병폐 중 하나가 바로 편을 가르는 것입니다. 보수가 보수다운 일은 못 하고 진보는 진보다운 일을 못 하고 있습니다. 진보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스스로를 진보라고 칭합니다.

 

우리는 편 가르기를 너무나도 좋아합니다.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아직도 진보와 보수를 나누는 편 가르기를 한단 말입니까? 진보와 보수를 나누는 것은 아주 케케묵은 생각입니다. 인공지능(AI)과 빅데이터가 중요한 4차 산업혁명 시대입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19세기, 20세기의 진영논리에 젖어 편 가르기를 하는 사람들은 양 진영의 극단주의자들입니다. 편 가르기하고 진영논리만 주장하면 되니 참 편리하죠. '진영'이라는 버스에 오르기만 하면 운전하는 수고 없이 끼리끼리 재잘거리다가 목적지까지 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진영 논리에 안주하고 있는 이 사람들이 기득권 세력들입니다. 요즘 진보와 보수로 편을 가르는 사람들은 진영논리에 의존하며 기득권에 안주하는 집단 이기주의의 화신이라고 봅니다."

 

▶ 진보 진영은 친일론을, 보수 진영은 지역감정과 종북론을 들고나와 선동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선동행위를 방지할 방안이 있을까요?

 

"선동행위를 방지할 방안을 마련하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우리나라 국민성을 바꾸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이지요. 우리 국민들은 즉각적, 감정적으로 반응하고 대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DNA를 어떻게 하루아침에 바꾸겠습니까.

 

정치인부터, 그리고 대통령부터 국민감정에만 호소하지 않도록 자제해야 합니다. 그런데 대통령부터 다시는 일본에 지지 않겠다며 국민감정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대통령에게도, 정치인에게도 기대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러면 누가 그 역할을 해야 할까요? 바로 언론입니다. 그런데 언론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대할 수 없습니다. 정부와 여당에 동조하는 '덩달이'로 비쳐져서야 되겠습니까? 어느 언론사에 속해 있든 기자로서의 사명감과 자부심을 가져야 하는데 일부 언론은 정부 기관지, 일부 기자는 정부 대변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결국 한 사람, 한 사람 서서히 고쳐 나가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선동가 치고 제대로 된 정치를 하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선동과 실정은 계속 되풀이되고 국민들은 속아요. 그래서 교육이 더욱더 중요합니다."

 

▶내년 총선까지 약 7개월 남았습니다. 의장님께서 지적하셨듯이 의정활동을 열심히 해도 실세에 눈도장을 찍지 못하면 공천을 받지 못합니다. '공천 제도 자체를 검증하려는 노력'을 각 당에 주문하셨습니다. 공천제도와 방식을 어떻게 개선해야 할까요?

 

"선거철만 되면 공천 관련해서 나오는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물갈이'. 언론 속성상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기자들은 '이번에는 물갈이를 몇 퍼센트 정도 할 계획이냐'고 질문하곤 합니다. 예를 들어 A당 위원장이 '우리는 25% 물갈이하겠다'고 말하면, B당 위원장은 '우리는 30% 물갈이하겠다', C당 위원장은 '우리는 35% 물갈이하겠다'고 말합니다.

 

그 말에 따라 공천심사가 이뤄지고 의원들은 내쳐집니다. 물갈이 비율을 맞추려고 그 기준을 들이대는데 인재가 하루아침에 나타나는 게 아닙니다.

 

물갈이를 20% 하든, 50% 하든 정치판은 안 바뀝니다. 예를 들어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면 사무관, 서기관, 부이사관, 이사관 등 경력을 쌓아 승진합니다. 공무원이 된 지 2년 된 사무관에게 갑자기 국장을 맡으라면 그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요?

 

문제는 물갈이가 과도하다는 것입니다. 해마다 국회의원의 50%가 물갈이됩니다. 공천에서 20~30%, 선거에서 20~30%가 물갈이돼 국회의원 50%가 바뀌는 나라는 세계 어디에도 없습니다.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는 말과 비슷하게 미국에서는 한 번 국회의원이 되면 90% 가까이가 재당선됩니다."

 

▶ 왜 '물갈이'가 제대로 되지 않을까요?

 

"우리는 물갈이하라고 했더니 물은 안 갈고 고기만 갈기 때문입니다. 썩은 물에 새 고기를 넣으면 새 고기도 오염되기 마련입니다. 썩은 물에 적응하는 물고기는 살고, 적응하지 못하는 고기는 죽습니다. 새 술은 새 포대에 담아야 합니다. 헌 포대에 새 술을 넣으면 되겠습니까.

 

물갈이 대신 '판 갈이'를 해야 합니다. '물갈이'라는 그 좋은 말이 물이 아닌 사람을 바꾸는 것이 됐으니 '판 갈이'를 하자고 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구조를 바꿔야 합니다. 구조를 바꾸려면 첫째가 개헌이고, 둘째가 정당법과 국회법, 정치자금법 같은 정치관계법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년 총선까지 7개월 남았는데 구조를 바꾸려고 하지 않습니다.

 

제가 18대 국회의장을 했는데 당시 '18대 국회는 최악의 국회'라는 말이 있었어요. 그런데 이후 '19대 국회는 더 최악의 국회', '20대 국회는 그보다 더 최악'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어요. 해마다 물갈이를 하고 또 해도 최악의 국회라는 소리를 듣는 이유는 정치판을 바꾸지 않아서입니다. 물은 안 바꾸고 고기만 바꿨으니까요. 우리 정치계는 바로 이 본질적인 문제를 고쳐야 합니다."

 

▶'의정활동평가'를 공천에 반영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의정활동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궁금합니다.

 

"국회의원의 주 무대는 국회입니다. 그런데 국회의원들이 국회에서 열심히 활동하는지 국민이 알 수 없습니다. 언론도 자극적인 것 위주로 보도하고 있죠. 제대로 활동한 의원은 한 번 더 국회에서 활동하도록 하고 제대로 하지 못한 의원은 더 활동하게 하면 안 됩니다. 각 정당은 활동 평가서를 객관적이고 공정하고 엄밀하게 만들어 공천에 반드시 반영해야 하는데 전혀 하지 않고 있습니다.

 

각 당에서 전문가에게 의뢰해서 의정활동 평가서를 만들고 다음 공천에 반영해야 엉터리 국회의원을 거를 수 있습니다. 싸움만 잘하고 고함만 잘 지르고 실세에게 잘 보이기만 하면 공천에 오를 수 있습니다. 의정활동을 열심히 하면 다음 공천에 탈락하는데 누가 열심히 하겠습니까."

 

▶국회 개혁방안에 대해 여쭙고자 합니다. 일각에서는 의원 수를 늘려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비례대표 선출방식을 어떻게 바꿔야 할지도 여쭤보고 싶습니다.

 

"표피적인 문제를 들먹이며 의원 수를 늘리자고 하고 있는데, 실상은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하려고 하다 보니 의원 수를 늘리려는 것입니다. 지역구 국회의원 수를 줄이고 대신 비례대표를 늘리자고 하면 제 목이 날아가는 국회의원들이 새로운 선거법에 찬성하겠습니까. 그래서 현행 의석을 최대로 지켜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국회가 국정이 아니라 개인적인 목적을 위한 곳으로 전락했습니다. 이렇게 수단이 목적을 압도하면 안 됩니다.

 

우리나라 국회의원 수는 미국에 비하면 많고, 유럽에 비하면 적습니다. 미국은 의원이 인구 70만 명꼴에 한 명이고, 의원 개개인에게 많은 활동비가 지급됩니다. 유럽은 의원 수가 우리의 2~3배 정도로 의원 수가 매우 많습니다. 명예직이라 보수가 아주 적은 대신 투잡, 쓰리잡이 가능하죠. 우리나라 국회의원들은 일이 많아 겸직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현실은 언급하지 않으면서 무조건 의원 수만 늘리자고 합니다. 의원 수가 200명이면 일을 못 하는데, 300명이면 잘하고 350명이면 더 잘하는 게 아닙니다. 의원 수를 늘릴지 현상 유지할지 잘 따져봐야 합니다."

 

▶비례대표 선출방식은 어떻게 바꿔야 할까요?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시한폭탄입니다. 시간이 촉박해서 공천 때까지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추진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현 정권은 꾸준히 그 길을 향해 가고 있어요.

 

그동안 제가 연동형 비례대표제에 대해 수없이 많이 얘기했지만 각 당이 잿밥에 눈이 어두워서 소홀히 듣고 있습니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비례대표가 더 많이 늘어나는 게 연동형 비례대표제'라고 말합니다.

 

비례대표가 지역구 의원보다 더 많으냐 적냐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과연 누가 비례대표가 돼야 하느냐, 그리고 어떻게 뽑느냐가 중요한 문제죠.

 

어느 당의 비례대표 의원이 15명 당선됐다고 해봅시다. 비례대표 후보 순번이 어떻게 결정됐는지 그 선출과정을 명확하게 밝혀야 합니다. , 누구는 1, 누구는 15번이 됐는데, 왜 누구는 16번이 돼서 의원이 되지 못했는지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1번과 15번은 똑같은 국회의원이라는 점에서는 같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어떤 연유로 1번이고 15번인지 명확히 해야 합니다. 중립성, 객관성, 공정성, 투명성이 담보되지 않는 비례대표 선출방식은 곤란합니다.

 

지금까지 비례대표는 줄만 잘 서면, 동아줄만 잘 잡으면 됐습니다. 대통령한테 눈도장 찍으면, 당의 실세에게 잘 보이기만 하면 됐어요. 실세에게 돈 보따리를 싸서 주면 전국구 비례대표가 될 수 있었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왜 이 사람이 비례대표가 돼야 하는지 그 선정과정도 잘 따져보고, 객관적이고 투명하고 공정한 절차에 따라 비례대표 순번을 결정해야 합니다. 이러한 과정이 뒷받침돼야만 제대로 비례대표제를 할 수 있어요.

 

독일은 비례대표제가 잘 돼 있다고 합니다. 완벽한 제도는 있을 수 없지만, 현재 비례대표는 열심히 하는 소수를 제외하고는 당의 전위부대처럼 행동합니다. 당에서 하라면 앵무새처럼, 행동대장이 돼 나섭니다. 4년 후에 어느 지역구에 출마할까 생각만 합니다. 이런 비례대표는 제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비례대표를 한 번 하면 적어도 4년은 국회에 출입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본래 뽑은 목적인 직능대표성과 전문성을 살릴 수 있습니다. 지금은 그 목적이 사라지고 줄만 잘 서려고 합니다."

 

▶의장님께서 저서 '누구를 위한 나라인가'에서 '상시 국회제도'를 언급하셨습니다. 우리나라에 상시 국회제도가 자리 잡지 못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18대 국회의장일 당시 '상시 국회제도'의 필요성을 주장했습니다. 청와대에서 대번에 비판이 날아왔어요. '지금도 국회에 발목 잡혀 장관이 일을 못 하고 있는데 장관을 24시간 국회에 잡아놓겠다는 거냐'고 비난했죠.

 

상시 국회제도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한 겁니다. 상시 국회제도는 '캘린더 국회'입니다. 국회 캘린더를 보면 일정이 다 정해져 있는데, 국회 운영도 그렇게 정하자는 것입니다. 월요일과 화요일은 본회의, 수요일과 목요일은 상임위원회 회의, 금요일은 특별위원회 회의를 여는 것처럼 하는 것이 상시 국회입니다.

 

해마다 국회 사무관이 연중 국회 일정표를 만들지만 지켜지지 않습니다. 일정표가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원내대표가 합의하면 회의가 열리고 합의가 이뤄지지 않으면 회의가 열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회의를 여느냐 마느냐로 원내대표끼리 치고받고 하는 나라는 세계 어디에도 없습니다.

 

국회를 학교에 비유해 보겠습니다. 학생이 학교에 안 가는 게 자랑거리인가요? 선생에게 질문하고 공부하는 것이 학생의 본분이지요. 그런데 학생이 학교에 가지 않겠다며 '등교'를 무기로 삼습니다.

 

상시 국회의 개념도 모르는 국회의원이 '국회 보이콧'을 투쟁의 무기로 삼습니다. 국회의원이 국회에 출근해서 정부에 따질 것은 따지고 파악할 것은 파악하는 게 의원의 본분입니다. 국회의원들이 국회의사당에서 밤을 지새우며 질의하고 문제를 제기한다면 국민이 두 발 뻗고 잘 수 있습니다."

 

김 전 의장이 1905년 을사늑약 체결 당시 김구 선생의 일화를 소개하며 정치 원로와 중진들에게는 '불쏘시개' 같은 역할을, 청년들에게는 적극적인 행동을 주문했다. [사진=위키리스한국]

 

▶방송과 인터넷, 사회관계망 등이 발전하면서 다양한 목소리가 표출되고, 그만큼 사회분열도 심각합니다. 분열을 멈추고 갈등을 넘어 화합을 이루려면 지도자의 역할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사회정풍운동 또는 정치개혁운동의 방향을 제시해 주셨으면 합니다. 특히 '합리적 보수'의 상징이신 의장님께서 앞장서실 의향이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수없이 얘기했지만 듣지 않는 것 같습니다. 때가 되면 하겠지요. 억지로 해서도 안 됩니다. 김구 선생의 일화를 하나 들려드리겠습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됐습니다. 민영환 공이 자결하고 이상설 참판이 자결을 시도했다가 발견돼 살아났죠. 그때 김구 선생은 죽기를 무릅쓰고 서울에서 제일 넓은 광장으로 나아가 '우리 대한이 일어나야 한다'고 외쳤어요. 일본 순사들과 육박전을 벌이고, 일본 순사들이 총질하면 기왓장을 던지며 항전했습니다. 1조가 일제에 잡혀가거나 죽으면 2조가, 2조가 잡혀가면 3조가 나서서 근 한 달간 싸움을 벌였어요.

 

그러던 김구 선생이 다 접고 고향으로 내려갔습니다. '당시 민중의 의식과 수준으로는 안 된다'는 판단에서였죠. 죽음은 두렵지 않지만 죽음이 나라를 되찾는 데 효과가 있는 방법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가서 애국 계몽 운동을 열심히 하고 민중을 가르치며 문맹 퇴치에 힘썼습니다.

 

사람들은 위기에 처하면 남 탓하고 회피하고 눈치를 봅니다. 나라를 위해 교육이 그만큼 중요합니다. 지금 나라가 어느 때보다도 어렵습니다. 나라가 위기라는 사실을 위정자들이 인정하지 않는 데서 문제는 더 심각합니다. 또 이를 보완하거나 대체할 세력이나 인물이 보이지 않는 것이 불안감으로 작용합니다. 바로 리더십의 위기입니다.

 

여야 어느 진영에 속하건, 나 같은 사람들, 다시 말하면 나라와 국민으로부터 큰 은혜를 입은 사람들은 이제 무엇을 더하고자 해서는 안 됩니다. 현직의, 이른바 정치권의 원로중진들은 자기가 중심적 위치에 있어야 하고, 킹은 아니어도 킹메이커가 되겠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후배들이, 그야말로 새카만 후배들이 나보다 훨씬 낫다, 우리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맡겨 놓으면 더 잘할 것이라고 인정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잘 먹고 잘살고 잘 대접받았으니 이 나라 정치발전을 위한 불쏘시개가 되겠다고 해야 합니다. 특히 편안한 지역구에서 쉽게 당선된 의원들은 특히 더 그래야 합니다.

 

정치를 꿈꾸는 젊은이들이여, 세상을 바꾸려면 지금이 기회입니다. 조금은 모자라고 조금은 서툴더라도 순수한 열정과 애국심으로 스스로를 무장해 달려나가야 합니다.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위해 떨쳐 일어날 때가 바로 지금입니다."

 

[위키리크스한국=조문정 기자]

 

supermoon@wikileaks-kr.org

 

 

 

[2019-09-16 위키리크스] 기사원문 ☞바로가기☜ 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