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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헤드라인

알키비아데스에 관한 명상

이 사람이 갑자기 떠오른 까닭은?

휘영청 밝은 달을 바라보며 나라 잘되기를 소망하면서도 짙은 달그림자가 일렁이는게 

내 눈에만 보이는 걸까. 문득 지금부터 2400~2500년 전 그리스를 뒤흔들었던 

희대의 인물이 떠올랐다.

 

알키비아데스 클레이니우 스캄보니데스

(Ἀλκιβιάδης Κλεινίου Σκαμβωνίδης, BC 450년~404년 경)

 

알키비아데스(BC 450?~404년). 이 사람이 내 마음의 달그림자 였나보다.

그는 명문 집안에서 태어났다. 돈도 많았다. 당시 아테네 민주정 최고지도자인 

페리클레스의 집에서 먹고 자란 페리클레스 가문이다. 

아마 조카쯤 되었을 것이다. 그는 당대 최고의 미남이었다. 

그가 지나가면 뭇 여인들은 물론 남자들까지도 그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하고 말을 붙이거나 

교태를 부렸다. 요즘 말로 하면 얼짱이요 몸짱이었다. 오늘날까지 전해오는 흉상 몇 점

(죽은지 100년 이후의 작품)이 그의 수려한 외모를 짐작케 해준다. 

그런 그가 고대 올림픽 대회의 하이라이트인 전차 경주대회에 무려 7개 팀을 내보내 그의 말들이
우승은 물론 상위권을 싹쓸이해버렸으니 그 인기를 짐작할 만하다. 요즘으로 치면 세계 최고급 

요트 경주나 레이싱에서 메달을 독점한 셈이다.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당시 그리스 직접민주주의 시대에는 말을 잘해야 

정치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는 웅변과 연설의 달인이었고, 선동 선전의 귀재였다. 

그가 얼마나 말을 잘하고 또 매혹적이었는지 심지어는 그의 흠이라 할 수 있는 혀 짧은 소리마저 

당시 유행이 될 정도였다.

 

돈 많은 명문가 자제였으니 스승도 좋을 수밖에 없어 최고급 족집게 과외 선생들을 들여놓았다. 

당대 최고의 현인 소크라테스가 그의 스승이었다. 소크라테스 밑에는 플라톤, 크세노폰 같은 

불세출의 제자들이 있었지만 알키비아데스처럼 놀기 좋아하고 방탕한 역대급 악동도 있었다. 

훗날 소크라테스의 죽음에도 알키비아데스와의 관계가 영향을 미쳤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둘은 '동성 연인'이란 세간의 의심을 살 만큼 사제지간 그 이상이었다. 

술에 만취해 유곽에 들어간 알키비아데스를 소크라테스가 끌어내고 있는 18세기 그림들은 

두 사람의 관계를 짐작케 해준다.

 

<쾌락의 팔 안에서 알키비아데스를 끌어내는 소크라테스>

(프랑스 화가 장 밥티스트 레뇨의 18세기말 작품, 루브르박물관)

 

돈 많고 집안 좋고 말 잘하고 게다가 잘생기기까지 했으니 그가 부러운 게 뭐가 있었을까. 

자부심이 넘쳐 오만방자하기 짝이 없는 이런 사람도 부러운 게 있을까? 있다! 그것도 치명적이다! 

바로 이것 때문에 그는 일생을 치열하게 살았으나 어느 한 순간도 만족하지 못했다. 

바로 권력과 명예욕이요, 주인공이 안 되면 참을 수 없는 정서불안증이다.

이로 인해 그는 언제나 주변을 긴장시키고, 서로를 불신케 하고, 상대를 적(敵)으로 만들어 

니편 내편끼리 지독히 싸우게 하고선 결국은 그 자신이 거짓과 불신 덩어리가 된 채로 

비극적 삶을 끝내고 만다. 욕망을 위해 끊임없이 남과 자신을 속이고 또 꾸며대야 했다.
겉만 번지르한 채 속으론 한없이 불안한 이 불행한 인생을 한번 더듬어 본다.

 

명明과 암暗 ,아니 어둠과 더 어두움
기원전 421년 스파르타와 아테네는 평화조약을 맺었다. 전쟁의 공포로부터 벗어난 시민들은 환호했다.
평화조약이 체결되기까지에는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다. 알키비아데스도 그 중 한 사람이다. 

그의 집안은 원래 스파르타 출신이었다. 그러나 조약이 발효되자 아테네 사람들은 이 조약을 

니키아스의 노력의 결과란 의미에서 '니키아스 평화조약'이라 부르며 칭송했다. 

누구보다 화가 난 사람이 바로 젊은 알키비아데스였다.

 

그는 아테네 시민들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자 그 즉시 평화론자에서 전쟁론자로 방향을 바꾼다. 

조약이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갖가지 방해·이간책을 늘어놓고, 

스파르타와의 전쟁만이 해결책이라고 공공연히 주장한다. 피 끓는 젊은이들이 동조하기 시작한다. 

그 전초전이 이탈리아반도 남쪽의 시칠리아(시라큐스) 원정이다.

 

알키비아데스의 선동은 주효했다. 많은 이들이 시칠리아 원정으로 일확천금을 손에 쥐는 꿈에 

부풀었을 뿐 그 도시의 전투력이 어떤지, 국제정세는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랑곳 않고, 원정에 따른 

위험부담이 뭔지는 알려고 하지 않았다. 주전파인 알키비아데스와 주화파인 니키아스가 공동으로 

원정대 사령관이 되는 이상한 지휘계통이 원정의 쓰라린 결과를 예감케 해준다. 출정을 앞두고 일어난 

기묘한 일로 알키비아데스는 원정지 도착 직전에 본국의 법정에 서라는 출두명령서를 송달받는다. 

 

알키비아데스는 그리 하겠노라고 안심시킨 후 감쪽같이 사라진다. 몇 달 후 그가 나타난 곳은 

누구도 상상 못한 스파르타였다. 그가 그렇게나 저주하고 싸워 없애버려야 

아테네에 평화가 온다고 했던 그 스파르타에 나타난 것이다. 

동학군 선두에서 죽창가를 부르며 척왜척양(斥倭斥洋)을 외치다, 신세가 여의치 않자 

일본으로 밀항하여 조선 침략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친일파가 있었을까.

 

스파르타 사람들조차 당연히 그를 믿지 못하건만, 그는 망설임도 주저함도 없이 

스파르타 민회(국회)에서 당당히 '궤변(詭辯)'을 늘어놓는다. 

"진정한 애국자는 고국에서 부당하게 쫓겨났는데도 그곳을 공격하지 않는 자가 아니라, 

고국에 대한 열정으로 무슨 수를 써서든 고국을 되찾으려고 노력하는 자입니다." (투키디데스 6.92.4.) 

그러면서 그는 아테네의 비밀을 "속속들이" 알려주며 스파르타로 하여금 아테네의 약점을 찌르도록 한다.

"조국을 사랑하기에 조국을 망하게 한다"는 알키비아데스의 궤변은 스파르타 사람들로선 

손해볼 게 없는 장사다. 아테네는 이 변절자 매국노로 인해 뼈가 아프지만 이만 갈 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그는 그날 이후 스파르타인보다도 더 스파르타인처럼 행동했다. 힘든 육체운동을 

똑같이 하고 냉수욕을 하며 스파르타식으로 머리를 기르고 공동식사에서 거친 빵과 검은 죽을 먹었다. 

스파르타 사회에서 발언권과 영향력을 점차 키워나갔다. 급기야는 그 잘생긴 외모로 왕비를 유혹하고 

그의 아이까지 배게 한다. 그러나 비밀은 오래 갈 수 없는 법. 왕이 알았다는 사실을 눈치챈 그는 

살기 위해 곧바로 스파르타를 탈출한다. 

 

이번에 그의 행선지는 바다 건너 페르시아가 지배하는 이오니아 지방이었다. 

그야말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이었다. 살라미스 해전(BC 480년)에서 퇴각했지만 페르시아는 여전히 

세계 최강국이었고 그리스 정복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리고 있을 때였다. 이 점을 누구보다 잘 아는 

알키비아데스는 에게해 연안 소아시아 지역을 관리하는 페르시아 총독의 신임을 얻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는 한편 스파르타와 아테네에 대해서는 자기를 통하지 않고서는 페르시아 총독과의 

접촉이 안 될 거라며 압력을 행사한다. 그의 모국인 아테네에는 민주정 해체를 노골적으로 요구한다. 

민주정으로 있는 한 자신의 복귀는 힘들었기 때문이다. 페르시아로서는 허풍과 위세 덩어리인 

이 망명객을 이용해 스파르타, 아테네 양국을 밀고 당기면서 기회를 엿본다.

 

그리스세계 최고 최장 최악의 세계대전이라 할 수 있는 펠로폰네소스 전쟁(BC 431-404년) 후반부에 

그는 정치와 전쟁의 세계에서 자기의 영향력과 입지 강화를 위해 잠시도 가만 있지 않는다. 

부단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테네, 스파르타, 페르시아 어느 곳으로부터도 그는 인정을 받지 못한다. 

애국심을 말아먹은 부도덕한 자가 획책하는 어떤 대책과 계략도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또 당연히 

성공할 수도 없었다. 평생을 공명심과 명예욕에 사로잡혀 동분서주했던 위선과 오만의 이중인격자는 

'신뢰의 결핍'이 자신의 치명적 약점이라는 사실을 죽을 때까지 몰랐다.

 

아테네는 결국 스파르타에 의해 멸망하고(BC 404년), 멀리 피신해 있던 그를 가장 먼저 찾아간 사람은
스파르타의 자객이었다. 정복 통치에 장애가 되는 첫 번째 제거 대상은 열렬한 애국자나 반대자가 

아니라 적과 아군 사이를 넘나들던 변절자라는 것은 역사의 평범한 교훈이다. 

이렇게 그리스 몰락 시대를 불꽃같이 살았던 희대의 인물 알키비아데스는 시골 작부와 함께 

불구덩이 속으로 사라진다.

 

※ 알키비아데스의 일화 두 가지 

◈ 어릴 때부터 고집불통이었던 그는 또래 아이들과 싸움질을 하면서 이빨로 상대를 물었다. 

    "너 왜 계집애처럼이빨로 내 팔을 무는 거야!" 하고 항의하자, 

    "무슨 소리, 난 사자처럼 문 거야!"라고 대답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사자새끼였을까, 아니면 과대망상 소유자였을까("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서)

 

◈ 아테네는 스파르타 주축의 펠로폰네소스 동맹에 대응하기 위해 델로스 동맹을 구축했다. 

    이 와중에 '밀로'(밀로스 또는 멜로스로도 불림)라는 조그만 섬에 동맹세를 과하게 요구하고, 

    항의하는 밀로섬을무자비하게 정벌 탄압한다. 남자는 모두 처형하고 여자는 전부 노예로 삼는다. 

    민주주의를 위한다면서 가장비민주적 방법을 동원한 데 대해 투키디데스는 그의 저술에서 

    상세히 지적하고 있다. 강대국의비인도적·부정직·부정의한 행태나, 약소국의 막연한 기대심리에 

    대한 경종을 울리는 국제정치학의 역사적 사례로 꼽힌다. 이 강경 진압을 주도한 사람이 바로 

    알키비아데스다. 

    그당시 알키비아데스가 가장 자주 쓴 말은'정의'였다고 한다. 지도자의 언행불일치의 심각성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밀로섬은 '밀로의 비너스'가출토된 지역, 이래저래 알키비아데스와 

    아름다움은 연결되는 모양이다. 

 

 

2019년 추석을 맞아

 

 

그림 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Alcibiad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