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김형오입니다.
요즘 <왕사남(왕과 사는 남자)> 열기가 뜨겁습니다. 천만 관객 돌파로 침체됐던 극장가를 흔들어 깨우더니 이번 주말을 지나고 나면 1300만 관객을 넘어선다지요? 어쩌면 <명량>이 세웠던 1700만 흥행 기록을 경신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갖게 합니다. 온 국민이 단종 앓이, 단종 신드롬에 빠진 느낌입니다.
나도 이 대열에 합류합니다. 단종이 유배됐던 청령포, 그의 넋이 머물러 있는 장릉, 또 단종 부인 정순왕후가 잠든 사릉을 찾은 지 어느덧 17~8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잊을 수가 없고 감회가 새롭습니다. 마침 그때 남긴 글이 떠올라 여러분과 공유하려 합니다. 장릉과 청령포 편은 <길 위에서 띄운 희망편지>에, 사릉 편은 <이 아름다운 나라>에 수록된 글들입니다.
영화의 흥행과 함께 청령포와 장릉을 찾는 이들이 부쩍 많아졌다고 합니다. 그런 분들이 이 답사기를 읽고 유적지에 간다면 영화에서 본, 혹은 미처 보지 못한 단종과 엄흥도의 숨결과 체취를 좀 더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을지도...
단종과 관련해 나는 "가장 슬프고도 아름다운 역사"라고 규정했습니다. 정순왕후의 사연 또한 기가 막힙니다. 청령포와 장릉에 곁들여 남양주에 있는 사릉도 찾아보면 더욱 좋을 것 같습니다. 그곳에 가면 역사가 현실로 가슴 깊이 다가옵니다. 내 책 사릉 방문기 말미에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 정순왕후님과 단종 임금님의 애절한 러브 스토리가 드라마나 영화 혹은 뮤지컬로 만들어진다면 세계인들의 심금을 울릴 수 있지 않을까요.
우연찮게도 정순왕후의 애틋한 삶은 몇해 전 박정자 선생의 열연으로 무대에 올랐습니다. 극이 끝난 후 박선생님과 시간가는줄도 모르고 얘기 나눴습니다. 이 눈물겨운 순애보를 누군가 스크린으로 옮긴다면 <왕사남>에 뒤이어 빅 히트를 칠 수도... 어쩌면 <케데헌> 같은 세계적인 선풍을 몰아올지도 모릅니다.
1. 단종 임금님에게
가랑잎 젖던 날, 저도 함께 젖었습니다
청령포(강원 영월)
21세기를 사는 제가 15세기를 살다 간 분에게 편지를 쓰려니 호칭이며 인사며 어투며 문체를 어떻게 써야 할지 조금은 난감한 기분입니다. 게다가 열일곱 살에 생을 마쳤으니, 예순 넘은 제게는 손자뻘인지 할아버지뻘인지 기준잡기 또한 애매합니다. 그래서 요즘 언어로 편지를 쓰되, 호칭은 일단 이렇게 정했답니다. 단종 임금님, 그래 놓고 나니 이제야 감이 잡히고 길이 보입니다.
안녕하십니까? 단종 임금님. 편지 첫머리부터 사족이 길었습니다. 장릉의 유택도 편안하고, 청령포 소나무들도 잘 자라는지요?
청령포는 영월군 남면 광천리. 남한강 상류에 위치한 단종 임금님의 유배지입니다.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상왕으로 있다가 그 이듬해인 1446년. 성삼문을 비롯한 사육신들의 상왕 복위 움직임이 사전에 누설됨으로써 상왕에서 노산군으로 강봉된 채 임금님은 그곳 청령포에 유배되었지요. 청령포는 삼면이 깊은 강물로 둘러싸이고 서쪽에는 깎아지른 절벽이 솟아 있어 나룻배를 이용하지 않고서는 출입이 불가능한, 마치 섬과도 같은 곳이었습니다.
절해고도와도 같은 청령포에서의 유배생활은 임금님이 지은 다음과 같은 시들에 가슴이 저리도록 잘 나타나 있습니다.
천추의 원한을 가슴 깊이 품은 채/ 적막한 영월 땅 황량한 산 속에서/
만고의 외로운 혼이 홀로 헤매는데/ 푸른 솔은 옛 동산에 우거졌구나. /
고개 위의 소나무는 삼계에 늙었고/ 냇물은 돌에 부딪쳐 소란도 하다./
산이 깊어 맹수도 득실거리니/ 저물기 전에 사립문을 닫노라.
원통한 새가 궁중에서 나온 뒤로/ 짝 잃은 그림자 되어 깊은 산 속을 헤맨다. /
밤마다 틈타 잠들려 해도 이루지 못해/ 해가 가고 또 와도 한은 끝이 없구나. /
새소리 멈춘 새벽 멧부리엔 달빛만 희고/ 피눈물은 봄 골짜기에 낙화처럼 붉구나. /
하늘은 귀먹어 애소를 듣지도 못하는지/ 어찌 수심 많은 내 귀만 홀로 밝은지….
기억하나요? 임금님이 그 적막한 유배지에서 외부와 두절되어 살 때, 폭풍우가 몰아치건 눈보라가 휘날리건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밤마다 남 몰래 임금님을 찾아와 문안을 드리고 갔다는 영월 호장 엄흥도를… 엄흥도는 임금님이 사약을 받고 죽임을 당했을 때, 마지막 순간까지 충성을 다해 기꺼이 목숨을 던져 임금님의 유택을 마련해준 분입니다. 숙종 임금도 "태화산이 무너지고 동강의 물이 마를지라도 그대 이름은 천추에 빛날 것이며 해와 달이 면하지 않는 한 영원하리라"라고 엄흥도를 칭송했지요.
비극이 있던 그해. 뜻밖의 큰 홍수로 강물이 범람하여 청령포가 물에 잠겼을 때, 임금님은 청령포와 육지 사이를 가로질러 누운 아름드리 소나무를 다리 삼아 강을 건너 영월 동헌의 객사로 처소를 옮겨야 했습니다.
그런 어느 날, 죽음의 사신이 찾아왔습니다. 작은아버지 세조의 명을 받아 사약을 갖고 내려온 의금부도사 왕방연이었지요. 한때 주군으로 모셨던 분에게 사약을 올리고 돌아가는 그의 발걸음은 얼마나 무거웠을까요? 왕방연은 서강 언덕에 앉아 하염없이 청령포를 바라보다가 비통한 심정을 가눌 길 없어 이런 시조 한 수를 읊조렸습니다.
천만 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
한양에 도착한 왕방연은 관직을 내던진 뒤 봉화산 아래 먹골이란 마을에서 배나무를 심고 기르며 묵객으로 생을 마쳤습니다. 왕방연이 심은 배나무에는 처연한 뜻이 숨어 있더군요. 기억하나요? 단종 임금님의 유배 길에도 호송하는 악역을 맡았던 그는 한여름 땡별에 목이 탄 입금님이 물 한 모금을 청했으나 세조의 어명으로 끝내 외면할 수밖에 없었답니다. 그게 두고두고 가슴에 가시로 남았던지, 왕방연은 단종 임금님 제삿날이 돌아오면 자신이 정성껏 기른 탐스런 배를 바구니에 가득 담아 영월을 향해 놓고는 한 번 절할 때마다 이마를 바닥에 세 번씩 짓찧는 고두배(叩頭拜)를 드렸지요. 유난히 맛이 달고 물이 많은 이 배는 그 뒤로도 태릉과 구리 지역에서 널리 재배되어 지금은‘먹골배’란 이름의 지방 특산물로 유명해졌답니다.
2000년 4월 5일, 단종문화제와 때를 맞추어 단종 어가가 청령포에 세워졌지요. <승정원일기>의 기록에 따라 기와집으로 당시 모습을 재현했다는데, 단종 임금님이 머물던 본채와 궁녀 및 관노들이 기거하던 사랑채에는 지금은 밀랍인형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인형들이 임금님을 비롯해 궁녀들과 관노들 모습으로 분장한 채 대역배우 역할을 하는 셈이랄까요?
청령포 뒷산 산봉우리 노산대 위에는 단종임금님이 쌓았던 망향탑이 아직 남아 있답니다. 태어난 지 이틀 만에 여읜, 얼굴도 모르는 어머니와 생이별한 왕비가 그리워질 때면 임금님은 뒷산 노산대에 올라가 까마득히 먼 한양 쪽을 바라보며 주변에 흩어져 있던 막돌들을 주워 모아 탑을 쌓아 올렸다지요? 그 망향탑은 임금님이 남긴 유일한 유적이 되었습니다
노산대 절벽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서강의 물줄기는 임금님의 한과 넋을 달래라도 주듯이 청령포를 어루만지며 흘러가서는 동강과 몸을 섞어 남한강을 이릅니다. 사릉에 있는 정순왕후 송씨의 넋은 남양주 두물머리 어디쯤에서, 서강물에 실려 온 단종 임금님의 넋과 만나 혼끼리 서로 섞는 건 아닐는지요?
장릉에는 임금님, 정령송(精靈松)이라는 소나무가 서 있더군요. 1999년 정순왕후가 묻혀 있는 남양주시 사릉에서 옮겨 심었다는 나무지요. 이승에서 못다 나눈 금실을 나누고 싶어서일까요. 소나무라도 가까이 두고 왕비 보듯 위안 삼으라는 걸까요? 한때는 장릉과 사릉을 한 곳에 합치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지방자치단체들 간에 이해가 엇갈려 무산되었다더군요.
청령포의 하늘을 가리고 서 있는 울울창창한 소나무 숲도 나무들 하나하나마다 절절한 사연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두 갈래로 갈라진 줄기 틈새에 단종 임금님이 걸터앉아 즐겨 쉬곤 했다는 키가 크고 듬직하게 생긴 소나무. 우거진 솔숲 한 가운데쯤에 우뚝 서 있는 그 노송은 임금님의 유배 당시 모습을 생생히 지켜보고[觀], 때로는 오열하는 소리를 들었다[音]는 뜻에서 관음송(觀音松)이란 이름으로 불리고 있지요. 나무도 임금님을 따라 슬퍼하고 아파해 그 상처의 혼적이 채 아물지 않고 아직도 줄기에 흉터 자국으로 남아 있다더군요.
키가 30미터. 가슴둘레는 5미터가 넘는 그 관음송은 한 가지는 하늘을 향해 뻗고. 다른 한 가지는 한양 쪽으로 비스듬히 자라 있었습니다. 하늘 쪽 가지에는 임금님을 향한 나무의 변함없는 충정이 담겨 있고, 한양 쪽 가지에는 왕비를 그리워하던 임금님의 애잔한 심정을 말해주듯이 말입니다. 썩 잘생긴 금강송인데, 수령은 600살 남짓으로 어림잡더군요. 임금님과 벗할 때의 나이를 80살로 추정해 계산한 수령이지요. 관음송은 사람 마음을 가장 잘 헤아리고 다독여주는 소나무로 알려져 세상살이가 고달프고 위로받을 일이 생기면 지금도 그 나무를 찾는 이들이 많다고 합니다.
단종 임금님은 신하 복이 참 많았던 분입니다. 임금님을 모시던 궁녀들이 '하늘에 해가 둘이더냐’면서 한밤중에 몰래 한양 궁궐을 빠져 나와 유배지로 왔을뿐더러, 또 숱한 의인들이 마지막까지 곁에 남아 충절을 지켰으니까요. 장릉에 있는 배식단사는 주군을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과 관노 그리고 궁녀들 268인의 위패를 모셔 놓은 사당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청령포의 소나무들은 모두가 단종 임금님 시대에 세상을 뜬 충성스런 신하들의 환생이라더군요. 죽어서까지도 임금님을 지키기 위해 절개의 표상 소나무로 다시 태어났다는 충신들… 신기하게도 그 나무들은 하나같이 임금님이 파란 두루마기를 입고 앉아 있는 어소를 향해 일제히 허리를 구부려 절을 하고 있었습니다. 충절의 소나무들이지요.
몸은 비록 정든 한양과 사랑하는 가족을 멀리 떠나 있었지만, 임금님 곁에는 그처럼 의로운 신하들이 많았던 겁니다. 생육신 원호도 그중 한 사람이었지요. 원호는 청령포로 흐르는 강물 줄기 상류에 초막을 짓고 살며 표주박에 글을 실어 띄워 보냈다지요? 그 글을 받아 읽은 임금님이 빈 표주박은 강물에 띄우면 표주박이 다시 강을 거슬러 올라 원호에게로 갔다고 하니, 그 정성에 강물도 감읍했었나 봅니다. 그 시절에 원호가 지었다는 시조가 지금도 전해지고 있지요.
간밤에 울던 여울 슬피 울며 지나갔다. / 이제야 생각하니 님이 울어 보냈나 보다. / 저물어 거슬러 흘렀으면 나도 울어 보내련만….
제가 청령포를 찾아간 날은 쉬엄쉬엄 가랑비가 내렸습니다. 온몸이 젖은 가랑잎들이 아직은 흙으로 돌아가기 싫다는 듯 거부하는 몸짓을 하며 머뭇머뭇 떨어졌지요. 가랑잎들과 함께 저도, 제 마음도 젖고 있었습니다. 장릉도, 청령포도, 강물도, 소나무 숲도 고스란히 비를 맞고 있었습니다. 그 옛날 신하들과 궁녀들의 넋도, 서강과 동강을 배회하는 임금님의 영혼도 그날 구슬프게 내리던 가랑비에 젖고 있었나요?
단종 임금님. 이제 그만 젖은 영혼을 햇살과 바람에 말리고 편안히 잠드셨으면 합니다. 정순왕후의 영혼도 그걸 바랄 테니까요. 청령포의 늘 푸른 소나무들과 더불어 영원한 안식을 누리시기를… 안녕히 계십시오.
PS. 사실 이 편지는 가이드를 해준 전순희 해설사에게 쓰려던 건데 수신인이 바뀌었습니다. 하지만 이상해요. 발신인은 저지만 꼭 전 해설사가 쓴 편지 같거든요 맞습니다. 이 편지는 어쩌면 제가 대신 쓴 '단종에게 보내는 전순희의 편지’ 일는지도 모릅니다. 왜냐면 그녀가 없었더라면 쓰지 못했을 편지기 때문이지요
<길 위에서 띄운 희망편지>, 생각의 나무, 2009.03. 25. (228~238쪽)
2. 이갑순 해설사님에게
가장 슬프고도 아름다운 역사 앞에서
장릉(강원 영월)
인간은 참 마음이 약하고 여린 존재인가 봅니다. 선거철이나 입시철. 취업 시즌이 다가오면 장릉을 찾는 참배객들이 부쩍 늘어난다고 하니 말입니다. 제가 장릉에 갔던 날은 평일이었는데도 수학능력 시험일이 가까워서인지 학생들과 학부모들 모습이 종종 눈에 띄었답니다.
안녕하세요? 이갑순 해설사님. 수능시험이 끝난 요즘, 장릉은 어떤가요? 시험을 잘 본 수험생들이 단종 임금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러 오나요? 그보다는 이제 입학원서를 낸 대학에 꼭 붙게 해달라고 기도하러 오는 수험생과 학부모들의 발길이 잦아졌겠군요.
조선시대 사람들은 묘지가 이승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왕의 무덤 역시 이승에서의 삶이 그대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과, 한편으로는 이승에서 못다 이룬 꿈을 저승에서나마 이루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담고 있었지요. 그 염원이 어린 공간이 바로 장릉입니다.
시험을 앞둔 수험생들, 출사표를 던진 정치인들, 직장을 구하려는 사회 초년생들이 장릉에 참배를 오는 까닭도 그래서겠지요. 어딘가 기대고 싶어지는 마음을 단종 임금에게 의지하려고 하는 거랄까요? 우리 역사를 통틀어 가장 애통하고 이루지 못한 염원이 많았던 단종 임금 묘에 참배함으로써 위안을 얻고 기를 받아 가려는 심리가 거기에는 잠재해 있다고 봅니다.
무려 519년이라는 유구한 역사를 이어온 조선의 왕릉은 북한에 위치한 제릉과 후릉, 경기도 여주의 영릉, 그리고 강원도 영월의 장릉만 빼고는 모두 서울 사대문으로부터 100리 안쪽에 자리해 있습니다.
조선 왕들의 평균 수명은 44세. 주로 눈병, 종기, 당뇨, 중풍 등의 질환으로 세상을 떴다니 격세지감을 느낍니다. 실제로 세종과 숙종은 당뇨병으로, 태조와 정종과 태종은 중풍으로, 문종·성종·효종·정조·순조는 종기로 세상과 작별했다더군요.
그런가 하면 정치사의 희생양으로 유명을 달리 한 왕도 있었습니다. 장릉의 주인인 6대 임금 단종이 그 대표적인 예지요. 삼촌인 수양대군에게 정권을 빼앗기고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인 청령포에서 감옥살이나 다름없는 유배의 삶을 살다가 결국 열일곱 살 나이에 사약을 받고 짧은 생을 마친 단종 임금. 조선의 27대 왕들 가운데서 단종은 가장 어린 나이에 억울한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와 경우는 다르지만, 연산군과 광해군도 반정세력에 의해 폐위되고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했지요.
야사에는 독살설의 주인공으로 거론되는 왕들도 있었습니다. 아들 명종을 왕위에 올리려는 문정왕후의 음모로 독약을 마시게 되었다는 인종 임금, 노론 가문 출신인 정순왕후 김 씨에 의해 독살당했다는 정조 임금 등이 그런 예입니다.
왕족의 무덤은 왕실의 위계에 따라 능, 원, 묘로 분류된다고 합니다. 능은 추존왕과 추존왕비를 포함한 왕과 왕비의 무덤, 원은 왕세자와 왕세자비 그리고 사친(私親: 종실로서 왕위를 이어받은 임금의 친어버이)의 무덤. 묘는 대군과 공주를 비롯한 나머지 왕족의 무덤입니다.
조선의 왕릉은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이 만나는 공간인 고무래 정(丁)자 모양의 정자각을 중심으로 3단계로 나뉘어 구성됩니다. 제사음식을 장만하는 재실이 자리한 진입로 주변과 홍살문까지가 산 사람의 영역이라면, 홍살문을 지나 정자각과 수복방과 수라간이 있는 지역은 참배자가 왕의 혼백과 만나는 성과 속이 어우러진 공간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언덕 위 봉분을 중심으로 곡장과 석물이 조성돼 있는 곳은 성역, 곧 세속을 떠난 왕의 공간이지요.
홍살문은 능원이 신성한 구역임을 나타냅니다. 이 문 앞에서 정자각까지 이어지는 긴 조약돌 길을 '참도' 라고 하는데, 참도는 왕의 혼령이 이용하는 중앙의 큰길인 '신도'와 살아 있는 왕이나 참배자가 이용하는 그보다 좁고 낮은 오른쪽 길인 ‘어도’, 그렇게 2단으로 조성되어 있습니다. 옛날에 왕릉에 제사를 지낼 때는 신도로는 신을 대신해 축관만이 가고, 현직 임금도 가마나 말에서 내려 예를 갖추고 아랫길인 어도로 갔다더군요. 참도가 끝나는 길에는 제사를 모시는 정자각이 세워져 있습니다.
장릉에 갔던 날, 저는 해설사님의 안내에 따라 낮은 길인 어도에 깔린 조약돌을 조심스럽게 밟으며 정자각으로 걸어가 단종 임금에게 참배를 드렸습니다. 술잔을 올릴 때는 국장을 못 치른 유일한 임금, 유배지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은 어린 단종의 영혼이 어른거리는 것 같아 가슴이 저릿했지요. 부슬부슬 내리던 비가 그 처연함에 무게를 얹어 주었는지도 모릅니다.
자, 그쯤에서 해설사님. 저는 이런 의문이 들더군요. 그렇다면 단종 임금의 부인 정순왕후 송씨의 무덤은 어디에 있는 걸까?
정순왕후 송씨의 무덤인 사릉은 장릉처럼 단릉 형태로 조성되어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사릉리에 터를 잡았습니다. 사릉은 노산군이 단종대왕으로 복위된 숙종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왕후 능으로 추봉된 까닭에 다른 능들보다 간소하고 단출하게 꾸며졌지요. 정순왕후가 단종 임금만을 생각하며 평생을 보냈다 하여 능호를 ‘사릉(思陵)’이라고 이름 붙였답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단종 임금은 돌아가신 뒤에도 사랑하는 부인과 멀리 떨어져 지내야 하니 말입니다. 더 애처로운 건 왕비인 정순왕후지요. 하필이면 사릉과 가까운 이웃 마을, 남양주시 진접읍에 세조의 묘지인 광릉이 있으니까요. 역사의 슬픈 아이러니랄까요?
역사에는 그러나 무릇 의인과 충신이 늘 있는 법이지요. 해설사님이 들려 준 의리와 충절의 표상인 옛 선인 이야기를 되새기면서 이 편지를 마치려고 합니다.
오호. 애재라! 단종 임금님의 옥체는 동강에 버려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후환이 두려운 나머지 천지간에 감히 아무도 나서서 손대려는 이가 없었지요. 그랬는데 이 무슨 하늘에서 내린 의인입니까. 영월 관아의 호장 엄흥도란 분이 강물에 떠내려온 단종의 옥체를 거두어 등에 업고 동을지산으로 올라가 산기슭에 암매장해 드렸답니다.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을 멸하겠노라”는 어명에도 불구하고 말이지요. 엄 호장은" 옳은 일을 하다가 화를 입으면 달게 받겠노라"면서 세 아들과 함께 남 몰래 시신을 묻은 뒤 뿔뿔이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눈 덮인 겨울날, 노루가 앉아 있다 떠난 자리만 눈이 녹아 있어 그 자리틀 파고 묻었다지요? 장릉은 당시 엄 호장이 단종을 암장했던 곳과 같은 장소랍니다. 그 뒤 충절을 인정받아 중인에서 양반 신분이 되고 순조 임금 때 공조판서로 승직한 엄흥도에게 고종 임금은 충의공이란 시호를 내렸지요. 우리 영월 군민들은 충의공 엄흥도를 기리기 위해 1997년 충절사란 사당을 세우고 해마다 단종문화제 기간에 제를 올리고 있답니다.
이갑순 해설사님. 짧은 시간이었지만, 2007년 문화유산관광해설 콘테스트에서 상을 받은 프로답게 해설 솜씨가 보통이 아니더군요. 덕분에 왕릉에 대한 지식과 안목을 한껏 넓히고 왔답니다. 절차가 까다로운 참배도 잘 마쳤고요. 앞으로도 관람객들의 사랑과 단종 임금의 총애를 동시에 받는 훌룡한 해설사로 남기를 바랍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PS. '가장 슬프고도 가장 아름다운 역사 앞에서', 방명록에 그런 글을 남겼습니다. 청령포로 가는 배 위에서 동행했던 집사람이 넌지시 묻더군요. "'왜 아름답다'고 했어요?” 부연하자면 장릉이 가장 슬픈 이유는 단종 임금의 한과 혼이 서려 있기 때문이고, 가장 아름다운 까닭은 주군을 위해 기꺼이 목숨 던진 여러 충신들의 피와 얼이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지요. 삶과 죽음을 초탈하여 역사와 권력 앞에 기개와 양심으로 맞섰던 수많은 의인들이 남긴 아름다운 역사 앞에서 숙연해진 순간이 탐방 기간 동안 여러 번이었답니다.
<길 위에서 띄운 희망편지>, 생각의 나무, 2009.03. 25. (220~227쪽)
3. 정순왕후님에게
그리운 사람 그리워지면
나 그리로 가리라
사릉(경기 남양주)
사릉(思陵), 당신께서 이곳에 묻히셨다는 말을 듣는 순간 저는 왜 뱀 사(巳, 蛇) 자가 먼저 떠올랐을까요. 왜 생각 사(思)자가 생각나지 않았을까요. 지금에야 실토하지만 당신같이 비운의 인생을 산 여성에게서 뱀을 떠올렸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당신께 늘 미안했습니다. 더구나 제 책(<길 위에서 띄운 희망편지>)에서 당신에 대한 언급을 여러 번 하면서도 책이 완성될 때까지 와보지 않았던 저의 게으름에 대해 늘 자책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제 책에서 가장 애틋한 마음으로 힘들게 쓴 부분이 당신과 당신 남편 단종에 관련된 것이었지요.
청량한 5월 첫 일요일. 큰 마음먹고 당신을 찾아갔습니다. 한평생 그리움에 지쳐서 쉽게 눈을 못 감았을 당신. 당신은 서울 근교 남양주에 조용히 묻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무슨 인연일까요. 이곳 사릉에서 불과11킬로미터 떨어진 곳에는 당신을 그렇게 만든 시숙 세조(수양대군)와 시숙모 정희왕후의 묘인 광릉(光陵)이 있습니다. 같은 남양주시 안에 불구대천의 인연이 함께 영면해 있다는 것이 너무나 안타깝고 마음이 짠합니다. 역사의 아이러니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겠지요.
단종과의 혼사를 맺어주고 2년 후에는 단종과 생이별을 시킨 세조의 그 원죄를 끝까지 묻기 위해 여기까지 오신 건가요. 그러나 당신이 이곳으로 온 이유를 안 순간, 절로 고개가 떨구어졌습니다. 한 많은 생을 마감했지만, 죽어서도 낭군한테 가지 못하고 더구나 시신을 수습할 사람도 없었다지요. 그나마 당신의 시누이신 정혜공주 시가(媤家)의 도움을 받아 해주 정씨 선산에 더부살이로 유택을 마련한 것이라고 하니 그 곤궁함은 말할 수 없었겠지요 이렇게 해서 광릉 인근 지역에 오게 되었으니 인연의 끈은 참으로 모질기도 합니다.
그 뒤로 숙종 24년(1698년)에야 당신은 단종과 함께 복위되고, 그때부터 능호를 사릉이라 불렀다지요? 평민으로 강등되어 돌아가신 지 177년 만에 왕후(定順王后)가 되신 이가 또 누가 있던가요.
겨우 산자락 몇 개를 사이에 두고 있는 광릉은 수목원 때문에 유명해진 곳입니다. 광릉과 사릉, 같은 시대에 살면서 권력과 영화를 위해 피의 역사를 써야 했던 가해자와 그피해자가 공존하는 공간. 이들은 지하에서 지금쯤 어떤 대화를 하고 있을까요.
사실 광릉은 세조의 유언에 따라 검소하게 조성되었습니다. 조선 초기 왕릉의 기준이 되었지요. 석실도 병풍석도 없고, 왕릉을 지키는 석수(石獸) 호랑이와 양이 각 두 쌍씩 암전히 서 있을 뿐입니다. 왕릉을 지키는 엄장함보다는 민화에 나옴직한 정겨운 모습입니다. 봉분을 둘러싼 난간석이 그나마 권위를 지켜줍니다. 세조보다 15년 후에 돌아가신 왕후릉은 좀 더 작은 모습으로 조성되었습니다.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이라 하여 제사를 모시는 정자각은 하나지만 왕릉과 왕후릉이 따로 만들어졌습니다.
다른 왕릉보다 봉분도 낮고 크지 않았지만 산 높은 곳에 조성함으로써 기품과 위엄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왕후릉은 광릉 숲 전체를 조망하는 높은 소리봉을 안산(案山)으로 할 정도로 사위가 툭 트여 신록의 바다를 만끽할 수 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당신이 묻힌 사릉은 시숙 내외의 빛나는 광릉에 비할 바가 못 되었습니다. 아예 난간석이 들어설 공간조차 없습니다. 그나마 문인석으로 치레는 했지만 무인석은 아예 있지도 않고 석수도 양과 호랑이가 조그만 덩치로 겨우 한 쌍씩만 외롭게 지키고 있을 뿐입니다.
얼굴이 찌그러진 채 힘들게 서 있는 호랑이(石虎)도 돌 자체를 원래 그런 놈을 써서인지 얼른 봐도 별로 정성들인 표가 나지 않습니다. 정자각 옆에 세워 놓은 숙종 때 하사된 비각이 ‘정순왕후 사릉'이라 말하지 않는다면 왕릉이라 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당신께선 조선조 왕비 중에서 가장 슬프고 어려운 세상을 사셨습니다. 열다섯 살 때 한 살 아래인 단종의 비로 간택되어 궁으로 들어왔지만 권력은 이미 수양대군의 손에 떨어진 후였습니다. 당신 편을 들어줄 대비도 대왕대비도 없었습니다. 하기야 세상 나온 지 3일 만에 생모가 돌아가시고 열두 살에 아버지(문종)를 여읜 남편 단종의 심정은 또 어떠했겠습니까. 2년 동안 왕과 비로서 소년소녀 부부가 함께 손잡고 웃어본 적이 몇 번이나 있었을까요.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 갈 때 당신은 함께하지도 못했습니다. 두 분이 생이별한 청계천의 ‘영 이별 다리'는 ‘영영 건너가버린 다리’라는 뜻의 영도교(永渡橋)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영도교 주변에서 염색업을 하며 근근이 생을 이어가는 당신께 동네 아낙네들이 채소전을 만들어 몰래 집안으로 먹을거리를 넣었다지요? 백성들이 당신을 얼마나 사랑했으며 또 삶은 얼마나 곤궁했겠습니까.
단종이 돌아가실 때 18세였던 당신께선 동대문 밖에 초막(정업원, 지금은 청룡사)을 지어 살며 흰옷과 소찬으로 평생을 보냈습니다. 날마다 가까운 언덕에 올라 단종의 넋이 있는 동쪽 영월을 보며 그리워했습니다. 그곳이 바로 동망봉(東望峰)입니다.
당신께서는 82세에 생을 마감하셨습니다. 시숙모 정희왕후보다 22년 뒤에 태어나서 그분이 돌아가신 후 38년을 더 사셨습니다. 조선의 비빈 중에서 가장 오래 사신 분입니다. 단종 임금 몫까지 사신 것입니다. 그리움이 사무치면 천명(天命)도 모질어지는 건지요.
살아 계실 때 온 백성의 애절한 사랑을 받았던 당신은 이승을 떠나서도 남편과 함께 추앙받고 있습니다. 생전에 일곱 분의 임금이 저세상 가시는 걸 보면서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요.
감히 말씀드리자면 당신이 묻힌 사릉이 조촐하다고 서운해 하실 것 없습니다. 하늘에 떳떳하고 땅에 떳떳했으니까요.
반면에 세조 부부는 어떠했습니까. 자식과 며느리가 일찍 죽고 본인들도 몹쓸 병에 시달리는 등 업보에 지친 삶을 살았던 것 아닙니까. 한국전쟁 때 광릉은 여기저기 총포 세례를 받아 아픈 자국이 남아 있지만. 당신 능은 멀쩡하지 않습니까.
정순왕후님, 짧은 신혼이 영원한 이별로 이어졌지만 지금은 도솔천에서 300리 떨어진 영월 장릉 주인 단종과 뜨거운 포옹을 하고 있겠지요. 광릉과 사릉과 장릉, 역사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곳, 영욕과 성쇠의 철리(哲理)를 깨닫게 하는 공간입니다. 이렇게 눈부시게 빛나는 5월, 이곳에 오니 한 편의 시가 떠오릅니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미당 서정주 시인의<푸르른 날>에서)
요새 사람들은 너무나 바쁘게 사는 것 같습니다. 사릉이라도 한 번 가서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해보는 것도 멋진 일이겠지요. 왕비님, 낭군님과 영원히 행복하세요.
PS. 지난해 6월 조선 왕릉이 드디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장릉의 주인공 단종의 슬프고 안타까운 이야기가 현지를 방문한 실사단을 감동시켜 결정을 이끌어내는 데 일등공신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희망편지> 1편에서 저 역시 가장 아련하게 썼던 부분이거든요. 스토리텔링은 그 자체만으로도 새로운 지적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경쟁력과 부가가치를 높이는 훌륭한 문화유산임을 새삼 입증시켜준 사례입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정순왕후님과 단종 임금님의 애절한 러브스토리가 드라마나 영화 혹은 뮤지컬로 만들어진다면 세계인들의 심금을 울릴 수 있지 않을까요.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 아름다운 나라>, 생각의 나무, 2010 04. 15. (42~49쪽)
책 본문에 여러 장의 사진이 많은데 여건상 위 글들과 함께 싣지 못해 아쉽습니다.

※ 한마디 더~~
내가 단종 관련 글들을 어떻게 쓰게 됐냐고요? 2008년 가을 국정감사 시즌에 <우리 국토 생생 탐방>이란 명분으로 방문했던 곳들 중 하나가 장릉과 청령포였고, 사릉은 그 이듬해 봄에 개인적으로 찾아갔던 곳입니다.
아니, 국정감사 기간에 지방 여행을 다녔다고? 예, 그렇습니다. 국정감사는 국회의 가장 중요한 연례행사입니다. 그런데 300명 국회의원 중 유일하게 국정감사륻 하지 않는 한 사람이 바로 국회의장입니다. 그래서 통상 국회의장은 이 기간 중 외국 순방을 합니다. 국회의장의 공식 방문을 여야 국회의원 몇이 수행해야 하고, 그러면 그들은 국정감사를 하지 않아도 됩니다. 의원들도 머리 싸매며 국감하기보다는 의장 따라 해외 가기를 은근히 바랍니다. 국감의 중요성을 잘 아는 나는 관행적인 해외 순방 대신 역사와 문화의 향기와 숨결이 깃든 우리 국토 구석구석을 찾아다녔습니다. 혼자 다녀도 되고 필요하면 해당 지역 국회의원이 잠시 참여했다가 국회로 돌아가면 되니까요.
의미 있는 곳, 보고 싶은 현장, 국민과 공유하고 싶은 이야기를 책으로 엮어 발간했습니다. 국회의장 임기 2년 동안 공식적으로 두 차례 국토 여행을 할 수 있었고, 답사 후 나온 책이 말씀드린 <길 위에서 띄운 희망편지>와 <이 아름다운 나라>입니다. 이미 출판사도 사라져 책을 사진 찍어 캡처하느라 옛날 함께 일했던 동료 직원이 수고했습니다. 당시 책도 제법 많이 팔렸는데 수익금은 전액 어려운 사람을 돕는 단체에 기부했던 일이 작은 보람으로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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