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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vs 2009년 가요계는 무엇이 달랐나?

SBS 가요대전, KBS 가요대축제, MBC 가요대제전

연말 시상식과 가요축제를 보면서 문득 "예전 가요계의 모습은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떠올렸습니다.


변진섭, 이승철, 박남정, 현철, 주현미 vs 소녀시대, 다비치, 애프터스쿨, 카라, 브아걸, 티아라

 

1989년의 최고 인기가수들과 2009년을 대표하는 걸그룹들을 놓고 보니 격세지감이라 느낍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강산이 두 번 변했을 가요계도 많은 일들이 있었겠죠?

과연 20년 전의 가수들은 어떤 노래들을 불렀을까요?
1989년의 가요판은 누가 주도했을까요?
그 당시와 지금의 가요계 분위기는 어떤 차이가 있었을까요?


▲ 양쪽의 공통점은 각각 1989년, 2009년에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는 것. 그리고 <소녀시대>란 곡을 불렀다는 것

 
 

'남자가수-오빠부대' vs '걸그룹- 삼촌팬'

 

2009년 가요계의 가장 큰 특징은 '걸그룹의 강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불과 몇 년전까지 '아이돌 스타'라고하면 미소년 그룹와 오빠부대를 떠올렸지만 2007년에 탄생한 원더걸스, 소녀시대가 걸그룹의 인기를 주도해 나간 후, 걸그룹은 유래 없는 전성기를 맞고 있습니다. 게다가 원더걸스는 <노바디>를 앞세워 미국 빌보드 메인차트 100위에 오르는 활약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걸그룹의 성장에는 삼촌팬들을 위시한 남성팬들의 증가세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걸 느끼게 해 준 대표적인 사례가 소녀시대의 <Gee>입니다. 공개녹화장에서 소녀시대가 이 노래를 부르는 중 따라부르는 남자팬들의 우렁찬 목소리를 여러분들은 한 번쯤 들어보셨을 겁니다.

 

"Gee Gee Gee Gee~ Baby Baby Baby~"

 

오빠부대의 소프라노급 환호성과는 다른 묵직한 힘이 느껴진다고나 할까요? 군대에서나 접할 수 있었던 이 광경은 이제 음악방송 녹화장에서도 보편화되고 있는 추세입니다.


▲ 1989년 가요계를 주도했던 3인방. 변진섭, 이승철, 박남정


2009년에 걸그룹이 가요계를 휩쓸었다면 20년 전의 대중음악은 어땠을까요? 1989년의 가요계 판도는 올해의 양상과 정반대였습니다. 양수경, 이선희, 이상은 등 여자 가수들이 있었지만, 남자 가수들의 위세가 대단했죠.

1989년의 초반을 장식한 것은 변진섭이었습니다. 변진섭의 <홀로 된다는 것>, <너무 늦었잖아요>를 히트 치며 가요계를 주도해 나갔죠. 그 당시 경쟁곡은 조성모와 이승환의 리메이크 하기도 했던 최호섭의 <세월이 가면>이었습니다. 박남정의 기역자 춤으로 유명한 <널 그리며>와 주현미의 <신사동 그 사람>도 인기를 끌었죠.

5월 전후로부터 이승철의 대활약이 시작되었습니다. 1989년 최다 음반 판매고를 올린 그는 <마지막 나의 모습>, <안녕이라고 말하지마>를 앞세워서 연중 흥행 돌풍을 이어갔습니다. 마약 스캔들이 터지고 방송 불가 등의 핸디캡을 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인기는 식을 줄 몰랐습니다.

조용필도 10집을 발표했으나 역시 스캔들이 터지면서 칩거에 들어가게 됐습니다. 그것이 가요계의 군웅할거시대를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만큼 신인 가수들이 치고 나갈 틈새가 더 커졌기 때문이죠.


▲ 조용필(좌)이 스캔들로 주춤한 사이 <여름날의 추억>으로 큰 인기를 누렸던 이정석(우)


늦여름 이후로 이정석의 <여름날의 추억>, 황치훈의 <추억 속의 그대>가 크게 유행한 노래가 되었고, 이후 김흥국을 지금에까지 있게 해 준 최대히트곡 <호랑나비>가 후반기에 등장했습니다. 그의 호랑나비춤은 전국적인 화제가 되었죠. 

 
이렇게 남자가수들의 강세가 이어지는 데에는 오빠부대의 공로가 컸습니다. 오빠부대를 몰고 다닌 원조격인 조용필, 이승철의 팬클럽이 여전히 건재한 것을 보면 당시 그들의 위용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느낄 수 있습니다.


▲ 이메일, 메세지, 인터넷 카페가 없던 시기에 팬레터는 가수와 소통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었죠



'발라드' vs '댄스음악'

 

2009년 가요계의 뒤흔든 장르는 댄스음악입니다.

 

걸그룹들이 펼치는 춤과 노래는 '대중문화의 아이콘'이 되고 있습니다. 이들 걸그룹들은 단순히 음악 프로그램 뿐만 아니라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영입 0순위의 고객들이죠. 그들이 보여주는 춤을 비롯한 다양한 장기는 대중들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습니다. 

 

비록 '아이돌 스타', '댄스음악', '걸그룹'으로의 획일화가 우려된다는 일각의 목소리도 있습니다만 2000년대 이후 듣는 음악에서 보는 음악으로 추이가 바뀐 것만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 소녀시대, 원더걸스와 함께 올해 걸그룹의 강세를 말해주는 애프터스쿨, 티아라


이에 비해 1989년은 지금처럼 비디오형 가수보다는 오디오형 가수가 좀 더 강세였죠. 박남정, 김완선, 소방차와 같이 춤-노래에 모두 능한 가수들도 있었지만, 발라드의 강세를 뒤집을 만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발라드 가수들이 인기를 끌면서 화보 촬영 등을 통해 자신의 이미지를 높여갔습니다. 지금은 인터넷이 주류 매체가 되면서 시청각에 영향을 미쳤지만, 당시에는 TV 못지 않게 라디오가 강세였던 시기였죠. 일부 잡지에서는 작사가, 작곡가 등의 순위를 따로 올리기도 했었구요.


▲ 이선희, 이지연과 함께 1989년을 빛낸 여자가수들. 춤짱인 김완선, <DDD>의 김혜림, 탤런트 출신 가수 지예



 '솔로' vs '그룹'

1990년대 초중반에 '서태지와 아이들'이 댄스음악을 대중음악의 주류로 끌어올린 시조격이었다면, HOT, 젝스키스 등의 남자아이돌 그룹은 본격적으로 정착화시킨 그룹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2009년부터 걸그룹의 강세가 눈에 띄는 가운데, 남성그룹에서 여성그룹으로의 이동이 있었을 뿐, 2000년대 중반 이후로 '아이돌 댄스그룹'의 위세는 더욱 강화되는 추세입니다.
 

물론 2000년대의 남녀 솔로가수들도 자기 영역을 구축하며 꾸준한 인기를 차지하고 있지만, 1990년대 중반까지의 대중음악 경향과 비교해본다면 상대적으로 그룹이 대세라고 하겠습니다.



▲ 인기스타 최수종과 <내 아픔 아시시는 당신께>를 부른 조하문은 처남-매부지간


이에 비해 1989년 무렵에는 그룹보다는 솔로에 집중되던 시기였습니다. 그룹으로 가요 차트에 이름을 올린 가수라면 소방차, 무한궤도(신해철)였고, 얼마 후 그들도 해체의 수순을 밟고 각자의 길을 가게 되었죠. 그리고 당시에는 현재와 같은 매니지먼트 체계를 갖고 있지 않았던 시기여서 그룹보다는 솔로가 보다 이점이 있었습니다.

1989년의 대중가요는 양질에 있어서 본격적으로 발전이 이루어지던 때였는데, 이 시기가 지나고 1990년대에 들어서자 '싱어송라이터'들이 대거 등장하여 가요계의 중심에 서게 되었죠. 그러면서 솔로와 그룹의 형태도 좀 더 다양하게 바뀌었습니다. 그룹에 따라서는 객원가수가 앨범의 타이틀 곡을 부르기도 했죠. 

1989년에는 이전의 시대까지 지배해오던 판에서 벗어나 신인급 솔로가수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고, 그들이 가요계에 태풍이 되자 가요계 내에서도 양질의 발전으로 평가했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는 국민들이 경제적 형편이 나아지면서 문화적 욕구가 조금씩 꿈틀대던 때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 1989년과 1988년에 다크호스로 돌풍을 일으킨 주역 <호랑나비>의 김흥국과 <담다디>의 이상은


과거 연말 가요시상식을 떠올리며


1990년대 중반까지 연말 TV 가요대상은 시대 분위기에 비해 보수적이었습니다. 다른 가수들에 비해 출연빈도, 노래가 방송에 나간 회수 그리고 음반판매량에서도 앞섰음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에 주도적으로 인기를 끌었던 곡이나 가수들이 연말 시상식에서는 외면 받은 측면이 있었죠.
 

특히 KBS는 좀 더 보수적인 경향을 띄었습니다. 1990년대 서태지와 아이들이 가요계를 휩쓸었지만, 대상을 단 한 번도 수상하지 못했죠. 그리고 KBS에서 댄스음악으로서 대상을 처음 수상한 곡은 1995년 김건모의 <잘못된 만남>이었고, 댄스그룹으로서 첫 가요대상은 1998년 <빛>을 부른 HOT였습니다.


▲ 이승환과 신해철은 헤어스타일 빼곤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 보이지는 않네요


1990년대 초반까지 매주 방영된 가요프로그램과는 달리 연말 가요시상식에서는 트로트와 비트로트로 나뉘는 구도에서 벗어나지 못했죠. 그리고 트로트에 대해서는 왠지 모를 어드밴티지가 있었습니다.

1989년에도 그러했습니다. 변진섭, 이정석, 이승철, 황치훈, 김흥국와 같은 가수들도 많은 사랑을 받았죠. 그러나 결과는 달랐습니다. MBC 10대가수가요제에서는 주현미가, KBS에서는 현철이 각각 대상을 수상했습니다.
(물론 이승철은 후반기에 마약 사건이 터지면서 방송 출연에 타격을 받았죠.)


▲ 진행자로 유명했던 임백천은 <마음에 쓰는 편지>라는 곡을 불렀죠.
그는 이경규와 <일밤>을 같이 진행한 바도 있고, <이경규의 몰래카메라>에 속은 적도 있었죠. "얼레리꼴레리~"


그런데 1990년대 후반부터 트로트의 위상이 달라지고 가요계의 인기 주도층이 10~20대쪽으로 쏠리자, 트로트가 연말시상식에 설 자리가 매우 좁아졌습니다. 그래서 MBC의 경우에는 1998년부터 4년간 10대가수가요제를 30대 이하-이상을 나누어서 시상하기도 했었습니다. 이후 가요시상식에 대한 과열 양상과 비난 여론이 일어나자 시상식은 폐지가 되고 가요축제 형식으로 전환되었습니다.

연말 가요시상식은 흥행성에 있어서 대중들의 이목을 끌만한 요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요즈음 각종 시상식이 그 의미가 퇴색되어감에 따라 회의론도 커졌습니다. 상에 대한 기준이 일관되고 명확하지 않는 이상, 연말에 상을 놓고 겨루는 가요프로그램에 대한 명분은 충분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연말 가요프로그램은 평소에 보았던 가수들의 재탕에서 탈피해서 다양한 이벤트와 실험을 통해 신선한 음악의 장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어쨌건 1989년과 2009년의 가요계 분위기를 비교해봤는데, 공통점도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데뷔 3년차 이하급의 신예 가수들이 가요계를 주도했다는 것이죠.


< 사진 출처 : 포토뮤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