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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초대석] 김형오 국회의장 


한국당, 물갈이 하랬더니 물은 안 갈고 고기만 바꾸려 해



 


백범 김구 선생의 살신성인의 자세와 희생·책임의 정신이 아쉽습니다.”

 

김형오(71) 전 국회의장은 지난 9자유한국당이 정말 절체절명의 순간을 맞이했다는 각오로 임할 때 필사즉생의 여지도 생길 수 있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김 전 의장은 이날 서울 마포구 개인연구실에서 가진 세계일보와 인터뷰에서 백범이 평생 마음에 새긴 경구 중 하나가 벼랑에서 나뭇가지를 잡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며 그 잡은 손마저 놓아버려야 장부라는 말이라며 지금 선거하면 한국당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될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을까 하는 처절한 각오와 심정으로 혁신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김형오 전 국회의장이 9일 서울 마포구 개인연구실에서 가진 세계일보와 인터뷰에서 6·13 지방선거 참패 이후 자유한국당의 수습 움직임과 관련해 한국 정치사는 물갈이를 하라는 민심의 심판에 물은 안 갈고 고기만 바꾼 사례가 허다하다제도와 정치문화(행태), 행위자 모두 바꿔야 정치판을 바꾸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 서상배 선임기자

 

김 전 의장은 6·13 지방선거 직후 한 토론회에서 한국당 참패 이유로 새로운 인물을 키우지 못한 죄 권력의 사유화에 침묵한 죄 계파 이익 챙기느라 국민 전체의 이익을 돌보지 않은 죄 집권여당에 제대로 싸우지도, 대안 제시도 못한 죄 교만과 오만, 막말과 품격 없는 행동으로 국민을 짜증 나게 한 죄 반성하지 않고 누구도 책임지지 않은 죄 희망과 비전을 등한시한 죄 7가지를 꼽았다. 촌철살인 같은 정리에 지방선거에서 한국당 후보를 찍은 지지자는 물론 등을 돌린 많은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당 한국당의 혁신을 바라는 많은 이들이 김 전 의장을 찾아 혁신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달라고 부탁했다. 그만큼의 식견과 경륜, 리더십, 무엇보다 망해가는 보수정당에 대한 애정을 갖춘 인사가 드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매번 나는 아니다며 에둘러 고사의 뜻을 나타냈다고 했다. 왜일까. ‘정치 현안에 대해선 말을 아끼고 싶다며 한사코 인터뷰를 거절하는 김 전 의장을 백범(18791949) 서거 69주기에 맞춰 펴낸 백범 묻다, 김구 답하다’(아르테)를 핑계로 만났다.

 

김 전 의장은 백범 선생의 차남 김신 장군(19222016)의 요청으로 20157월부터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회장을 맡고 있다. ‘백범 묻다, 김구 답하다의 부제는 우리가 가슴에 새겨야 할 백범 김구의 생애와 사상이다. 백범이 1947년 펴낸 회고록·자서전 백범일지를 토대로 백범(白凡·평범한 사람)이 질문(Q)하면 김구 선생이 답(A)하고 김 전 의장이 추가 설명을 보태는(+) 형식이다. 기념사업협회 회장을 맡은 직후 요즘 같은 세상이야말로 백범 정신이 무엇보다 필요한 시대 아닌가요?”라는 출판사 대표 말에 용기를 내 내리 3년을 집필에 매달렸다.



 

김 전 의장은 백범일지가 피로 쓰여진 책이라고 부를 만큼 김구 선생의 삶이 여느 드라마보다 더 극적이라고 강조했다. 김구 선생이 엄혹한 시대상황에 맞서 온몸을 던지며 조국과 민족을 위해 희생한 초지일관된 삶을 산 분이라고 소개했다. 김 전 의장은 백범의 사상에 대해선 투철한 국가관과 불타는 동포애, 민족 중심의 평화주의라며 백범만큼 생각()과 말()과 행동()이 일관된 분은 없다고 단언했다.

 

20세기 독립투사의 삶과 정신, 자세가 21세기 한국 사회에 던지는 화두는 무엇일까. 김 전 의장은 혼돈·혼미의 시대, 그 어느 때보다 영웅을 그리워하지만 더 이상의 영웅은 나올 수 없다고 운을 뗐다. 이어 개개인 모두가 스스로 영웅이 돼야 하는 시대, 특정 지도자가 끌어가는 게 아닌 우리 모두가 영웅적 자질과 품성을 갖고 영웅적 행동을 해야 하는 시대라며 김구 선생의 책임감과 희생, 헌신이 21세기 현대사회 영웅의 모델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다음은 김 전 의장과의 일문일답.

 

대개 보수진영은 해방 이후 존경하는 정치인으로 이승만 전 대통령을, 진보진영은 김구 선생을 꼽는다. 한나라당(자유한국당 전전신) 출신 국회의장으로서 백범기념사업협회장을 맡고 이번에 책까지 낸 까닭은.

 

김구 선생 같은 분을 보수, 진보와 같은 이분법적인 개념으로 바라보는 것은 좀 시정이 돼야 할 것 같다. 백범이라는 사람의 일생일대 올곧은 삶을 당시와 오늘날 상황에 비춰 어떤 식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것인지가 기본이 돼야 한다. 내가 김구 선생을 존경하는 이유는 그 엄혹한 상황 속에서 당신은 어떻게 온몸을 던져가며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는 초지일관된 삶을 사셨을까 하는 점이다. 김구 선생의 삶과 정신을 무슨 이념이나 사상에 따라 세분화하는 것은 조금 사치스럽고 한가하다는 느낌이 든다.”

  



기자 출신으로 그간 술탄과 황제’ ‘누구를 위한 나라인가’ ‘길 위에서 띄운 희망편지등 많은 책을 냈다. 이번 책도 술술 쓰셨겠다.

 

기념사업협회장 직을 맡고 난 뒤 얼마 안 있어 술탄과 황제를 펴낸 출판사 대표가 김구 선생에 관한 기획안을 갖고 찾아왔다. 그런데 내가 백범 전문가도 아니고, 명색이 백범기념사업협회장인데 당신에게 누를 끼치는 것 같아 단칼에 거절했다. 그런데 대표가 요즘 같은 시대에 김구 선생을 제대로 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더라. 마음이 흔들려 틈만 나면 선생 묘소를 찾아가고 백범일지를 들춰가며 이 일을 감당할 수 있을지 되물었다. 결국 선생의 민족사랑이나 리더십을 제대로 알리고 싶어 책을 쓰게 됐다.”

 

예비독자들, 특히 젊은세대에게 꼭 소개하고 싶은 대목이 있다면.

 

안중근 의사 집안과의 극적인 만남, 김구 선생의 멘토고능선과의 교유, 애절한 가족사 등 많고 많다. 그중 백미는 백범과 이봉창·윤봉길 의사의 관계를 묘사한 부분이다. 이 나라가 거저 생긴 나라가 아니라 우리 선열들의 피로 이뤄진 나라였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당신들의 뜨거운 애국혼에 나 스스로 글을 쓰면서 울기도 했다. 오늘날 고뇌하고 방황하는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삶의 자세, 힘과 용기를 줄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

 

자유한국당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다. 그래도 해방 이후 한국 정치사를 이끌어온 한 축인데 요즘 보면 비판을 넘어 조롱거리로 전락한 느낌이다. 의장도 한국당의 7가지 죄로 알려진 강연도 하시고 한국당 비대위원장 제안도 받으신 걸로 알고 있다.

 

그날 강연의 핵심은 한국당 비판이라기보다는 이 나라 정치판을 바꾸자는 것이었다. 사실 더 (세게) 이야기하려다가 그래도 전에 몸담았던 곳인데, 너무 짓밟으면 (내가) 나쁜 사람이 되는 것 같아 차마 더 하지 못했다. 이번에 기념사업협회장 맡으면서 다시는 정치에 복귀하지 않는다고 다짐을 했다. 이런 전제하에 한국당을 중심으로 보자면 요즘은 정치가 사라진 것 같다. 정치라는 게 없다. 가만히 보면 절박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아마 자기들 선거(총선)까진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있다고 보는 것 같다. 그래선 안 된다. 물갈이를 하랬더니 물은 안 갈고 고기만 바꾸려는 꼴이다.”



 

정치판을 갈아야 한다고 했는데,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나 다른 야당에 당부하고 싶은 말은.

 

여야 하나씩만 지적하자면 여당한테서는 국정주도 정당이라는 말을 듣고 싶다. 민주당이 지금까지 앞장서 문제를 제기하고 (정책을) 이끌어나간 게 뭐가 있으며 청와대의 무리한 정책추진에 대해 제동을 걸어본 적이 있는지를 묻고 싶다. 야당은 제발 국회 보이콧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무슨 틈만 나면 (요즘은 국회 본청 앞 계단인 것 같지만) 국회 바깥으로 뛰쳐나가는데 가관이다. 국회에서 36개월 치열하게 싸우고 토론한 적 있는가. ‘일하는 국회 좀 만들어달라는 대통령·정부 비판에 일하는 국회는 정부 입맛대로 법률안을 통과시켜주는 게 아니다고 자신있게 반박할 수 있는 야당 모습을 봤으면 한다.”

 

마지막으로 정치권에 몸담은 지 30년이 넘었다. 나이로는 종심(從心·하고 싶은 대로 하여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다)이다. 정치권이나 인생 후배들에게 건네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

 

조선 세종대왕이 재위 7년 어전회의에서 했던 말을 소개하고 싶다. ‘위국지도(爲國之道) 막여시신(莫如示信)’. 나라를 다스리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먼저 국민의 신뢰를 얻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국민들께 우리를 믿어달라고 호소하기에 앞서 국민이 신뢰할 수 있는 진정성을 보여줘야 한다. 그리고 나이 얘긴데, 일흔이 되면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건 공자 같은 성인군자뿐이다. 나 같은 사람은 70이 아니라 80이 되어도 법도에 어긋날지, 괜찮을지 항상 경계하고 삼가며 살아가야 한다. 됐제?”

 

대담=송민섭 정치부 차장

 

정리=이우중 기자 stsong@segye.com


김형오 전 국회의장은

 

경남 고성(71) 부산 경남고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서울대 정치학 석사, 경남대 정치학 박사 동아일보 기자 국회의원 5(14~18) 한나라당 사무총장, 원내대표 18대 국회 전반기 국회의장 국민훈장 무궁화장 부산대 석좌교수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회장




[2018-07-11 세계일보] 기사원문 바로가기 클릭


Posted by 김형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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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선생이 타던 차와 동일한 차종(뷰익 로드마스터) 앞에서 김형오 전 국회의장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4차 산업혁명 대비에 읽으면 좋은 전기·자서전은 어떤 게 있을까. 스티브 잡스 전기? 우리와 가까운 곳에서 찾는다면, 백범 묻다, 김구 답하다(아르테·사진)가 있다. 김형오(70) 전 국회의장이 알기 쉽게 풀어쓴 백범일지. 그는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회장을 맡고 있다.


백범 묻다, 김구 답하다출간


3일 서울 효창동 백범김구기념관에서 만난 김형오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4차 산업혁명이 아니라 5·6차 산업혁명에서도 그 기본 중심은 인간이다. 백범은 솔선수범해서 희생과 책임의 리더십을 다했다. 4차 산업혁명에서도 적당히 해서 될 일은 없다. 얼마나 경쟁이 치열한가. 백범의 투철하고 철저한 애국혼·정신 자세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백범 묻다, 김구 답하다


다독가인 김 회장은 백범일지에 대해 이처럼 솔직한 회고록·자서전이 있을까. 세계 유명한 사람들의 회고록·자서전 어느 것을 보더라도 이만큼 솔직하고 진정성을 담은 경우는 참 드물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김 회장이 던지려는 메시지는 이것이다. “우리나라는 거저 생긴 게 아니다. 수많은 선열이 피와 땀과 눈물과 목숨을 바친 끝에 탄생시킨 나라다. 우리가 이 나라를 위해 좀 더 경건하고 겸손하게 공동체에서 할 일을 찾는 게 이 시점에서 너무나 절실하다.”

많은 정치인, 명사들이 가장 좋아하는 인물로 혁명가·독립운동가 김구(1876~1949)를 꼽곤 한다. ‘별로 욕먹을 일 없는무난한 인물이라 그럴까. 아니면 진심으로 존경하기 때문일까. 이에 대해 김 회장은 백범은 생각과 말과 행동이 일치한, 시종일관한 삶을 산 드문 분이다. 그래서 존경을 받는 게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김 회장은 김구의 혁명가 리더십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김구 선생에게 목숨을 맡기고 독립운동을 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대부분 일제의 촘촘한 첩보망에 발각돼 거사 직전에 붙잡혔다. 거사를 감행한 경우에도 윤봉길·이봉창 의사만큼 성공적이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형장의 이슬이나 모진 고문 끝에 돌아가셨다. 백범이 줄 수 있는 게 뭐가 있었겠는가. 지위를 주나, 명예를 주나 황금을 주나. 백범을 신뢰하고 존경하지 않으면,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겠는가.”   

 

김 회장은 가능하면 이 책을 쓰지 않으려고 했다고 밝혔다. 저작권이 풀려 이미 백범일지류만 300종가량 된다. “뭘 잘못 보태거나 해서 백범 선생에게 엄청난 누가 될 수도 있다는 걱정과 부담 때문에 지난 3년 동안 효창원 백범 묘소와 백범김구기념관에 있는 백옥으로 만든 좌상을 자주 찾았다고 했다. 하지만 젊은이들에게 백범의 뜻과 정신을 알릴 필요가 있다. 이런 시대일수록 백범의 정신이 좀 더 많이 국민에게 전파되고 투영되면 좋지 않겠느냐는 명분을 머리와 가슴 속에서 떨쳐버릴 수 없어 집필에 착수했다


백범 묻다, 김구 답하다라는 책 제목이 좀 아리송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백범 김구 선생이 자문자답했다는 뜻이 아니다. 책 제목의 백범은 보통 사람을 의미한다. 김형오 저자가 보통사람을 대표해 물었다는 뜻. 내년 2019년은 백범 서거 70주년이다


·사진=김환영 지식전문기자 whanyung@joongang.co.kr 



[2018-07-05 중앙일보] 기사원문 바로가기 클릭


Posted by 김형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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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답식으로 서술한 김구의 삶·사상

 

  















백범 묻다 김구 답하다 / 김형오 엮음 / 아르테



 

김형오 전 국회의장이 백범일지를 문답식 구성으로 풀어냈다. 저자는 지난 3년간 매일 효창원 백범 묘소와 백범 좌상을 마주하며 김구의 삶과 사상, 시대와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 공을 들였다.

 

책은 그 결과물로 전문 연구가가 아닌 보통사람의 마음으로 김구의 생애와 생각을 진솔하게 바라본다. ‘보통사람을 가리키는 김구의 호 백범(白凡)처럼, ‘보통사람들의 질문에 김구가 직접 답하는 Q & A 형식을 취한다. 여기에 저자가 시대 상황 등에 대한 추가 설명을 더하고 잘 알려지지 않은 김구의 인간적인 모습도 조명한다. 김 전 의장은 세월이 흐를수록 백범은 더욱 그리운 이름, 절실해지는 얼굴이다. 늘 푸르게 깨어 있고 서늘하게 살아 숨 쉬는 얼과 혼이라며 이 책은 그런 선생과 백범일지에 바치는 헌사라고 밝혔다.

 

저자는 김구를 무작정 존경하거나 따르기보다는 배워야 할 점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을 구분해 삶의 귀감으로 삼으라고 조언한다. 412, 19800.

 

최현미 기자 chm@munhwa.com




[2018-06-29 문화일보] 기사 바로가기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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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현식 2018.06.30 08: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본 입장엔 테러리스트 맞구만....
    안중근도 테러리스트고
    따질려면 전주이씨 종친회를 욕해야지.....
    나라 팔아 먹고 그렇게 됐으니....



<2018-06-29 부산일보>

[잠깐 읽기] 백범의 길:조국의 산하를 걷다 (강원·충청·전라·경상 편)/김상기 외



김구 선생을 찾아서


백태현 기자

 

백범 연구자들이 권역을 나눠 김구의 흔적과 체취가 서려 있는 곳을 찾아 그의 인생 역정을 더듬은 전기이자 답사기가 나왔다. 강원·충청·전라·경상 지역을 다루는 2권에서는 무주와 김천에 남은 흔적을 통해 유완무, 이시발, 성태영 등이 김구를 민족 지사로 키우기 위해 비밀리에 회동을 벌인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또 김구가 '애기 접주'라는 칭호로 불리며 활약하다가 정부의 탄압으로 피신하게 된 마곡사에서 스님이 되고자 했지만 결국 속세로 돌아온 사연도 소개된다. 특히 환국 후 한국독립당의 세력을 확대하기 위해 시작한 지방 순회의 길은 그가 젊었을 적 도움을 받았던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표현하는 보은의 길로 이어지는데, 순천 보성 함평 김제 전주가 그 지역들이다.

부산 전재민수용소, 충무공시비, 촉석루 등 항일 정신이 깃든 장소를 방문한 김구의 발걸음도 확인할 수 있다. 서울·경기·인천 지역을 다룬 1권은 별권으로 출간됐다. 김상기 신복룡 도진순 한규무 김용달 지음/아르테/292/25000


백태현 선임기자 hyun@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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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9 광주일보>


[박성천 기자가 추천하는 책] 백범의 길 (1·2)

행동하는 이상주의자·꿈꾸는 리얼리스트 김구의 삶

김명섭 외 지음



백범 선생 서거 70주기,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기념

투옥 생활 서대문감옥·동학 활동하다 마곡사 피신 이야기 등

역사·정치 분야 전문가가 김구 발자취 찾아 떠난 여행기

 

 

김구가 인천감옥에서 탈옥해 수십 일 동안 은거했던 보성 쇠실마을에 있는 김광언 가옥.

 

우리가 그토록 장소에 주목한 것은 역사가에게는 현장감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역사의 현장은 영감을 준다. 탐방객들 사이에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유행하지만, 그보다는 사랑하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맞다고 느끼기에, 우리는 김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의 발자취도 사랑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글을 썼다. (서문 중에서)

 

올해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지 100, 3·1운동이 일어난 지 100년이 되는 해다. 또한 백범 김구 선생(1876~1949) 서거 70주기가 되는 해이기도 하다. 나라 잃은 백성으로 억압과 설움을 겪어야 했던 우리 민족에게 김구는 독립운동의 대표이자 상징이었다


최근 남북 화해 분위기를 타고 통일에 대한 염원이 확산되고 있다. 남북정상회담, 북미정상회담으로 평화국면이 전개되고 있지만 분명한 것은 남북 분단은 여전히 진행 중이라는 점이다


스스로 민족의 문지기가 되고자 했던 백범 김구는 “18세에 붓을 던진이후 시종 유랑생활을 하며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완전한 자주독립을 소원하던 그의 발길은 조국의 산하 구석구석에 미쳤고 중국 대륙에까지 이어졌다.


김구 선생 서거 70주기,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해 역사와 정치 분야 전문가들이 김구의 발자취를 찾아 떠난 역사 여행기 백범의 길’(2)을 펴냈다.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가 기획하고 김명섭 연세대 교수, 심지연 경남대 명예교수, 김상기 충남대 교수,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 등 관련 전문가 10인이 필자로 참여했다. ‘조국의 산하를 걷다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책은 행동하는 이상주의자이며 꿈꾸는 리얼리스트였던 김구의 전기이자 답사기이다. 서울·경기·인천을 아우르는 1권과 강원·충청·전라·경상을 포괄하는 2권으로 구성돼 있다. 곳곳에서 백정범부(白丁凡夫·평범한 백성)의 삶을 지향하고 민족의 독립에 헌신했던 인간 김구의 숨결을 만날 수 있다


김형오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 회장은 발간사에서 멀고도 험난한 노정이었다. 길도, 안내인도, 등불도 없었다. 백범은 스스로 길을 내고 등불을 밝히며 고단한 발걸음을 내디뎠다우리는 그 길을 되밟기로 했다. 발자취를 더듬고 흔적을 헤아리며 백범의 숨결과 체혼을 느끼려 했다고 밝혔다


1권에서는 서울과 인천 그리고 경기 지역에서 찾을 수 있는 김구의 흔적을 다루었다. 서울 근교와 투옥생활을 했던 인천감옥과 서대문감옥도 살폈다. 김구의 삶에서 1945년 환국 이후의 시기는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맞게 된 미소 양국의 대립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으로 통일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애썼지만 대의를 이루지 못했다.


2권에서는 동학에 심취해 활약하다가 마곡사 등으로 피신했던 이야기, 도움을 받았던 이들에게 고마움을 표현하는 보은의 길 등 인생 역정을 돌아보는 여정을 담았다. 순천, 보성, 함평, 김제, 전주에서의 여정이 그러한 내용이다.

“‘백범일지를 읽다 보면 감동적인 장면이 한둘이 아니지만, 필자는 이대목이 가장 인상적이다. 40여 일 남짓 머물다 떠나는 생면부지 낯선 타지인에게 정성스럽게 만든 붓 주머니를 이별의 선물로 건네준 선씨 부부의 따뜻한 마음, 그리고 22세 꽃다운 나이 때 만난 동갑내기들이 48년이 지난 70대 노인이 되어 다시 만났을 장면이 떠올라서다.” (‘보성 김광언 가옥-쇠실마을에서 추억에 잠기고’)

 

/ 박성천 기자 skypark@kwangju.co.kr  

소설가인 박성천기자는 전남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국문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전남대에 출강중이며 소설집 메스를 드는 시간등 다수의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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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9 한겨레>


백범의 길-조국의 산하를 걷다 백범 김구 선생의 70주기인 내년을 앞두고 기념사업협회의 기획으로, 신복룡, 도진순 등 8명의 정치·역사학자들이 전국을 다니며 백범의 흔적을 쫓은 답사기가 두 권의 책으로 나왔다. 김형오 협회장(전 국회의장)<백범일지>를 문답식으로 풀어쓴 <백범 묻다, 김구 답하다>도 함께 출간됐다. /아르테·각 권 25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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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9 영남일보>


남북 평화 모드재조명되는 백범 선생의 삶과 사상



김구 선생 관련 다양한 책 잇단 출간

지난 26일은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인 백범 김구 선생의 서거일이었다. 남북 평화 분위기가 조성되는 시기에 자주 독립을 주장했던 김구 선생의 삶과 사상이 재조명되고 있다. 출판계에서도 김구 선생을 주제로 한 책이 다양하게 나오고 있다.

 

김구 백범일지 나의 소원 자서전’(부크크)은 백범 김구 탄생 142주년을 기념해 나온 책이다. 김구 선생이 직접 쓴 백범일지가 담겨 있다. 김구 선생의 어릴 적 이야기와 기구한 젊은 시절의 이야기를 만나 볼 수 있다. 3·1운동 이야기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김구 선생의 독립에 대한 염원이 담겨 있는 나의 소원역시 볼 수 있다.

 

역사학자 박성순이 쓴 김구 선생이 얘기한 깨어있는 시민’(백두문화재연구원)은 김구 선생의 일대기를 다룬 책이다. 독립운동가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고, 김구 선생의 애국정신, 민주주의 정신, 계몽주의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김구 선생의 삶을 통해 2018년을 살고 있는 우리가 진정으로 가져야 하는 가치는 무엇인지 이야기한다.

 

백범 묻다, 김구 답하다’(아르테)는 김형오가 쓴 책으로 백범일지를 문답식으로 재구성한 책이다. 김구의 호 백범(白凡)평범한 백성이란 뜻이다. ‘보통 사람을 말한다. 이 책은 보통 사람의 눈으로 김구 선생을 바라본다. ‘어떻게 삶, 어떻게 죽을 것인가’ ‘백범은 왜 백범인가등 백범의 어린시절과 청년시절 그리고 탈옥수 시절, 끝으로 광복을 맞은 시절까지 백범의 일대기를 60개의 질문과 답변으로 구성했다.

 

백범의 길:조국의 산하를 걷다’(아르테)<>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가 펴낸 책이다. 김구 선생과 관련한 역사학계와 정치학계 연구자 8명이 참여했다. 2권으로 구성된 이 책은 전국 팔도에 숨어 있는 백범의 흔적을 찾고 있다. 19세에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분노해 일본인 쓰치다를 살해한 후 인천감옥에서 수형 생활을 한 이야기와 한국독립당 세력을 확대하기 위해 지방 순회 길을 다녔던 이야기 등을 살펴볼 수 있다.

 

유승진기자 ysj1941@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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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마을]


고문·굶주림에 흔들렸던 백범, 위대한 투사도 보통사람이었다

 

 

서화동 기자

 

백범 묻다 김구 답하다   

김형오 지음 / 아르테 / 41219800


악형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은 굶기는 벌이다. 배가 고플 대로 고픈 때에 차입밥을 받아서 먹는 고깃국과 김치 냄새를 맡을 때에는 미칠 듯이 먹고 싶다. 아내가 나이 젊으니 몸을 팔아서라도 맛있는 음식을 늘 들여주면 좋겠다는 생각도 난다. (중략) 사람의 마음을 배고파서 잃고 짐승의 성품만이 남은 것이 아닌가 하고 자책하였다.”   

 

백범 김구의 초상화 /한경DB

 

김구 선생(1876~1949)백범일지(白凡逸志)’에 남긴 절절한 고백이다. 19111월 황해도 일대의 민족주의자를 모두 잡아들인 안악사건으로 전격 체포된 백범은 서울로 압송돼 모진 고문과 굶주림, 회유에 시달렸다. 매에 장사가 있으랴. 고문에 못 이겨 정신줄을 놓은 사이 제자 이름을 말해버린 뒤엔 혀를 물어 끊고 싶었다고 했다. 1947년 처음 국내에서 출간된 백범일지가 지금까지도 널리 읽히는 국민애독서가 된 것은 조국 독립에 평생을 바친 백범의 위대한 삶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나약함과 치부마저 숨기지 않은 진솔함 때문이다.

 

백범 묻다, 김구 답하다는 김형오 전 국회의장이 쓴 백범 가상 인터뷰다. 선생의 호 백범은 평범한 백성, 즉 보통 사람이란 뜻이다. 책 제목의 백범은 선생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이다. 저자는 백범일지를 완전히 해부하다시피 해 보통 사람들의 질문에 선생이 답하는 형식으로 책을 구성했다. 60개의 질문과 답, 여기에 저자의 해설을 덧붙여 비범한 혁명가이자 진솔한 인간이었던 백범의 삶을 보여준다. 기자 출신답게 쉽고 간결한 문체로 깊고 풍부한 이야기를 담아냈다.

 

황해도 시골의 상민 집안에서 태어나 아버지의 숟가락을 엿과 바꿔 먹은 개구쟁이 일화부터 동학의 아기 접주로 명성을 날렸으나 결국 실패했던 청년기의 좌절과 경험, 명성황후 시해를 복수하려고 일본군 장교를 살해한 뒤의 옥살이와 탈옥, 유랑, 농촌계몽운동, 임시정부를 이끌며 분투했던 중국 망명 시절의 간난신고(艱難辛苦)가 책 전체에 담겨 있다.  

 

인상 깊은 것은 백범의 인간적인 면모다. 백범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두 차례의 투옥으로 어머니와 아내가 옥바라지를 하느라 모진 고생을 견뎌야 했다. 번번이 혼사가 깨져 서른이 넘어서야 결혼했지만 망명생활을 하느라 가족과 함께 산 세월은 짧기만 했다. 그나마 같이 살 때도 두 아들에게 아버지는 잠깐씩 다녀가는 손님 같은 존재였다. 대신 그에겐 임시정부의 동지와 식구들로 구성된 대가족이 있었다.



  

이들을 먹여살리며 독립을 준비하는 일을 백범은 달팽이의 등껍질처럼 지고 살았다. 하지만 백범은 단 한 번도 이를 탓하거나 불편해하지 않았다. 임시정부는 월세도 못낼 만큼 가난에 쪼들렸지만 백범의 몸엔 60만원이라는 천문학적 현상금이 붙었다. 임시정부 청사 임대료 1600년치를 내고도 남는 돈이었다. ‘움직이는 복권신세가 된 백범을 고발한 한인은 없었다. 저자는 백범은 그들에게 현상금 60만원과는 비교할 수 없는 소중한 존재였다고 설명한다.

 

백범은 또한 결코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거나 평가하지 않았다. 나이, 지역, 출신 성분도 따지지 않았다. 19311월 백범이 상해 임시정부의 재무부장과 거류민단장을 맡고 있을 때였다. 한 청년이 찾아와 젊은 날 일본으로 건너가 여기저기 떠돌다 독립운동에 뜻을 두게 됐는데 상해에 가정부(假政府)’가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왔다고 했다. 말의 절반은 일본어인 데다 행동거지도 일본인과 비슷했다. 가정부는 임시정부를 폄하해 부르던 말이었다. 다들 미심쩍어했지만 백범은 그와 우국담론을 나누며 의기투합했다. 그 청년이 바로 철혈남아이봉창 의사였다.

 

저자는 열린 마음과 애국 열정, 삿됨이 없는 정의감이 백범과 사람들을 하나로 묶고 한 길로 가게 했다엄혹한 임시정부 시절, 배신의 유혹이 도사리고 있는 상해에서 수많은 애국자와 투사는 그렇게 태어나고 길러졌다고 평했다.  

 

백범일지 마지막에서 밝힌 대로 백범의 평생 소원은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었다. 그래서 백범에겐 일제의 무조건 항복이 복음이 아니라 비보였다. 일지에서 백범은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이었다고 했다. 향후 전개될 통일정부 수립 과정에서 외세 영향력이 커지고 우리 정부의 발언권이 약해질 것을 걱정해서였다. 주변 강국들의 영향력이 여전한 지금의 한반도를 보며 백범은 뭐라고 할까. 책을 읽는 내내 울컥한 마음을 진정하기가 어렵다.

 

서화동 문화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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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9 조선일보 : 최경운·이슬비의 뉴스 저격




"조국 앞에선 좌익도 우익도 없다통합의 끈 놓지않았던 게 白凡정신"




조선일보 최경운 기자 이슬비 기자




오늘의 주제: 金九 선생 서거 69주기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장 김형오 국회의장에 물었다

 

 

내년(2019)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자 임정(臨政)을 이끌었던 백범 김구(金九·1876~1949) 선생 서거 70주년이 되는 해다. '임정 100주년-백범 서거 70주년'을 한 해 앞두고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회장 김형오 전 국회의장)는 백범 기리기 사업에 나섰다.

 

백범 서거 69주기 날인 지난 26일에 즈음해 백범의 광복 후 국내 행적을 기록한 '백범의 길'을 펴냈다. 다음 달엔 임시정부 시절 백범의 행적을 좇아 중국 답사를 한다.

 

 

김형오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회장은 "온갖 고난 속에서 임정을 이끈 백범 정신은 조국 독립과 자유를 향한 희생과 헌신의 여정"이라며 "백범의 순수한 애민, 애족, 애국의 열정을 오늘에 되살려야 한다"고 했다. 김 회장은 최근 '백범일지(白凡逸志)'를 재구성해 풀어낸 책 '백범 묻다, 김구 답하다'(출판사 아르테)를 펴냈다. 저자인 김 회장을 만나 백범의 삶이 갖는 의미를 짚어봤다.

 

백범이 독립투쟁에 나선 정신적 기반이 궁금하다.

 

"백범의 일생을 관통한 저항 정신은 어릴 적 양반의 핍박을 온몸으로 받아내면서 상놈 신세 벗겠다는 '면천(免賤)' 의식에서 비롯됐다. 하지만 망국을 겪은 백범은 '상놈 콤플렉스'에 머물지 않았다. 훗날 백범은 양반에게 분노와 증오를 품기보다 '양반도 깨어라, 상놈도 깨어라'라며 통합과 개화를 강조했다. 저항하되 정신적으로 성숙한 평등주의자, 그것이 그를 독립투쟁으로 이끌었고, 수많은 분파와 갈등이 내재했던 독립운동 세력의 지도자로까지 끌어올렸다."

 

봉건적 세계관의 소유자였던 백범이 어떻게 혁명가가 됐나.

 

"백범은 17(1892) 때 양반이 되려고 과거에 응시했다. 하지만 당시 과거장은 대작(代作), 대필(代筆)이 다반사인 난장판이었다. 백범도 남이 대신 짓고 써준 답안지를, 그것도 효도하겠다는 생각에 아버지 이름으로 제출했다. 그러나 낙방했다. 부정·부패로 얼룩진 세상을 보고 개벽을 꿈꾸며 이듬해 동학(東學)에 입교했지만 우국충정과 분노만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음을 깨닫게 됐다."

 

백범은 이후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격분해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에서 일본인을 죽인 '치하포 사건'(1896)으로 인천감옥소에서 사형수로 복역한다. 감옥에서 백범은 개화에 눈을 뜬다. 고종의 어명으로 사형 집행을 면한 그는 이후 탈옥해 방랑하다가 기독교에 귀의해 교육사업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일제의 탄압으로 국내 활동이 여의치 않자 중국 상하이로 망명길에 올랐다. 김 회장은 "백범의 표현을 빌리면 상하이 임정 시절이 '죽자꾸나 시대'였다면 충칭(重慶) 임정 시절은 '죽어가는 시대'였을 정도로 고난의 연속이었다"고 했다.

지난 25일 서울 용산구 백범김구기념관에서 본지와 인터뷰하는 김형오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회장. 김 회장은 우리 사회 지도자들이 희생과 헌신이라는 백범 정신을 되새겨야 한다고 했다


지난 25일 서울 용산구 백범김구기념관에서 본지와 인터뷰하는 김형오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회장. 김 회장은 우리 사회 지도자들이 희생과 헌신이라는 백범 정신을 되새겨야 한다고 했다. /박상훈 기자


백범이 임정의 지도자가 됐을 때 상황은 어땠나.

 

"백범은 1919년 상하이로 망명해 임시정부 청사 문지기를 자청했다. 그런 백범에게 도산 안창호 선생은 경무국장을 맡긴다. 하지만 임정은 시작부터 대통령 이승만을 지지하는 세력과 국무총리 이동휘 세력의 사상이 달라 갈등을 빚었다. 민주주의 세력과 공산혁명 세력의 대립이었다. 1921년 이승만이 상하이로 부임해 집무를 시작하자 이동휘는 총리직을 사직했고, 이승만도 결국 넉 달 만에 미국으로 돌아간다. 임정은 허울만 남은 채 좌·우익 갈등을 겪었다. 백범이 국무령에 취임하기 직전 2년 동안 6명이 국무령을 맡을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백범은 1926년 국무위원 전원이 사직해 사실상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던 임정의 국무령에 취임했다. 당시 임정은 국무령이 내각을 이끄는 체제였다(백범은 1940년 임정 주석에 취임한다). 재정 상황도 최악이어서 독립운동 자금은커녕 청사 운영비조차 막막했다. 192069000달러였던 임정 수입은 19271445달러, 1928975달러로 줄었다. 임정이 나라 안팎의 독립운동을 지휘하기 위해 조직한 연통제가 일제의 탄압으로 위축된 탓이었다. 백범은 임정이 가진 권총 네 자루 중 두 자루를 팔아 운영비로 쓰기도 했다. 잠은 청사 빈방에서 자고 동포들 집을 기웃거리며 밥을 얻어먹고 지냈다.

 

침체한 임정의 독립투쟁이 되살아난 계기는 무엇이었나.

 

"백범이 조직한 애국단의 두 청년, 이봉창·윤봉길 의사가 벌인 의거(義擧)이다. 두 청년이 연이어 일으킨 의거는 일제의 이간계(離間計)로 악화했던 중국인들의 반한(反韓) 감정을 되돌려놨다. 두 의거는 백범의 '열린 마음' 덕분에 가능했다. 이봉창 의사의 경우 신원과 출신이 불분명하다는 주변의 우려가 컸지만 백범은 겉모습이나 나이, 지역, 출신을 따지지 않고 믿고 썼다. 백범은 애국 열정으로 독립투사를 길렀고, 그들은 기꺼이 조국을 위해 싸웠다."

 

하지만 1932년 윤봉길 의사 의거 이후 일본의 탄압과 감시가 옥죄어와 임정은 상하이를 떠나 충칭에 이르는 5000의 피란길에 오른다.


임정 국무위원들 - 중국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이끌다 1945년 광복을 맞은 조국으로 돌아온 백범 김구 선생(왼쪽 사진). 오른쪽은 백범 선생이 1935년 중국 자싱(嘉興)에서 임시정부 국무위원들과 함께 찍은 사진. 당시 임시정부 국무령이었던 백범은 60세였다. 뒷줄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송병조·김구·조성환·차리석·이시영·이동녕·조완구 선생. /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제공


100여 명의 임정 대가족을 광복 때까지 이끈 리더십의 비결은 뭔가.

 

"남녀노소가 뒤섞인 피란 행렬은 더디고 어지러웠다. 하지만 '백범일지' 어디에도 임정 식구들에 대한 불평은 없다. 오히려 대열에 합류한 이들에게 고마워하고 미처 동행하지 못한 이들에게 미안해한다. 아무리 멀고 힘들고 버거워도 등에서 임정을 내려놓거나 팽개치지 않은 것, 그것이 백범의 리더십이다."

 

대한민국은 곳곳에서 남·(南南) 갈등을 겪고 있는데.

 

"백범은 자유와 평등이 넘치는 조국을 갈망했다. 이를 위해 독립운동 단체들의 연대를 끊임없이 촉구했고 끝까지 좌·우익을 통합하기 위해 분투했다. '통합''연대'의 백범 정신을 지금 되살려야 한다."

 

우리나라 지도층은 백범에게 무엇을 본받아야 할까.

 

"백범은 임정 국무령과 주석을 맡은 지도자였다. 그런데 그 자리는 백범이 원해서나 바라서 한 게 아니었다. 가장 많이 희생하고 헌신한 사람이 백범이었기에 맡겼을 뿐이다. 특히 우리 정치인들은 백범의 희생과 헌신의 자세를 배워야 한다."

 


임정 대가족의 피란길本紙, 내달초 그들의 발자취 따라간다

 

1919413일 중국 상하이(上海)의 프랑스 조계(租界) 지역에 둥지를 튼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32년 윤봉길 의사의 4·29 의거 이후 상하이를 떠나 피란길에 오른다.

 

백범이 이끈 피란 행렬에 동행한 이는 100여 명에 이르는 대가족이었다. 그 시절 백범은 일제(日帝)를 피해 중국 도시와 산하를 떠돌아다니는 달팽이 신세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피란길 지도


상하이를 탈출한 임정은 인근 저장성 항저우(杭州)로 이동했다가 1935년부터 자싱(嘉興), 전장(鎭江), 난징(南京)으로 옮겼다. 1937년 일제가 난징을 점령하자 임정 대가족은 다시 이삿짐을 쌌다. 창사(長沙)로 옮겼으나 일본의 공습이 본격화돼 오래 머물 수 없었다. 창사를 떠나 기차로 피란 가는 임정 대가족은 일본군의 공습 때문에 가다 서기를 반복해야 했다.

 

임정 일행은 남부 광둥성 광저우(廣州)에 도착했으나 일본군이 광저우로 진격함에 따라 다시 함락 하루 전날인 19381020일 광저우를 탈출해야 했다. 40일 만에 류저우(柳州)에 안착했다가 몇 차례 더 피란 끝에 19409월 충칭(重慶)에 정착했고 거기서 해방을 맞았다.

 

피란길은 가혹했다. 동행한 일행 가운데 피란길에 병사(病死)한 사람이 여럿 있었다. 백범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도 그중 한 명이었다.

 

본지는 다음 달 초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와 공동으로 임정 대가족의 행적을 따라 광저우~류저우 피란길 답사에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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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8 동아일보] 인터뷰


김형오 “백범, 치부조차 모두 드러낸 인간적 투사”



69주기 추모식에 ‘백범 묻다…’ 책 헌정

김형오 前 국회의장의 김구 예찬


김형오 전 국회의장은 27일 서울 용산구 백범김구기념관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백범일지에는 자기를 본받으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숱한 과오를 반면교사로 삼아 다시는 같은 전철을 밟지 말라는 간곡한 뜻이 담겨 있다”며 “이는 두 아들뿐만 아니라 온 겨레에게 전하는 당부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이 나라가 거저 생긴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얼마나 많은 눈물과 아픔으로 일구어졌는지를 지금 세대들에게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26일 서울 용산구 효창동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열린 백범(白凡) 김구 선생 제69주기 추모식에서는 ‘백범 묻다, 김구 답하다’라는 책 한 권이 영정에 헌정됐다. 저자는 김형오 전 국회의장(현 백범 김구 선생 기념사업협회장·사진). 


김 전 의장은 27일 “백범을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제대로 아는 사람도 드물다”며 “좀 더 친숙하고 쉬우면서도 깊이 있게 백범을 알리고 싶어 이 책을 썼다”고 말했다.

‘백범 묻다, 김구 답하다’는 ‘백범일지(白凡逸志)’를 재구성한 책. 보통사람들이 백범에게 가진 의문과 지적을 왜 그때 그렇게 했는지 백범이 직접 답하고, 여기에 저자가 설명을 덧붙이는 형식으로 이뤄졌다. 제목의 ‘백범’은 백정과 범부, 즉 평범한 백성을 의미한다. 백범이 답하는 부분은 백범일지를 토대로 했다. 



김 전 의장은 “처음 책을 의뢰받았을 때는 내가 이 일을 감당할 수 있는지, 해도 되는지 고민이 많았다”며 “위대한 보통사람의 삶을 짧은 글에 잘 담을 수 있을지 걱정됐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먼저 공부를 시작했고, 출간된 백범일지가 300여종이 넘어 다양하게 각색·편집된  관련 서적 수십 권을 놓고 씨름하느라 출간까지 3년여가 걸렸다고 한다.

 
김 전 의장은 “백범일지를 공부하면서 치부조차 솔직하게 드러낸 백범의 인간됨에 감명받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백범이 일지에서 “감옥에서 굶주린 창자를 움켜쥐고 있을 때 음식 냄새가 코를 찌르면 젊은 아내가 몸이라도 팔아서 아침저녁으로 맛있는 음식이나 사식을 넣어주면 좋겠다는 더러운 생각까지 났다”는 고백까지 했었다는 것. 김 전 의장은 “백범을 냉정한 투사로만 생각하기 쉽지만 한편으로는 보통사람이면 밝히고 싶지 않은 부끄러운 사건과 생각까지도 숨김없이 고백하는 너무나 인간적인 분”이라고 말했다. 


그는 책에서 백범 가족과 동아일보의 인연도 소개했다. 백범은 일지에서 ‘1925년 상해에서 두 손자를 키우시던 어머니는 내 짐을 덜어주려고 네 살배기 막내 신을 데리고 본국으로 돌아가는 길을 택하셨다. (…) 내가 노자를 조금밖에 못 챙겨드려 인천항에 내리자마자 여비가 떨어졌다. 어머니는 동아일보 인천지국을 찾아가 사정을 얘기하셨다. 그러자 지국에선 상해 소식과 어머니의 딱한 형편을 기사로 읽었다며 서울행 차표와 여비를 드렸고, 서울에서 다시 동아일보 본사를 찾아가니 역시 사리원까지 보내드렸다고 한다’고 적었다. 


김 전 의장은 “1932년 1월 8일 이봉창 의사의 의거가 있었지만 일제의 보도통제로 국내 언론이 제대로 보도하지 못할 때 동아일보만 호외를 네 번이나 발행하고 이 의사 사진과 집을 소개했다”고 설명했다.


추모식에서는 ‘백범 묻다…’ 외에 기념사업협회 차원에서 출간한 ‘백범의 길, 조국의 산하를 걷다(국내편)’도 헌정됐다. 백범이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시절 거쳤던 장소와 사건들을 일일이 답사해 정리한 것이다. 김 전 의장은 “내년은 백범 추모 70주기, 3·1운동 100주년을 맞는 뜻깊은 해”라며 “내년에는 상하이에서 충칭까지 백범이 중국에서 활동한 지역을 중심으로 2부를 낼 계획이며, 3부는 북한 지역의 노정을 담을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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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 서울대동창회 신문] - <명사칼럼> 김형오 전 국회의장


영웅은 죽어서 탄생한다



김형오 외교67-71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회장
전 국회의장



김구, 절벽에 매달려 손을 놓다 


1896년 초봄, 기울어져 가던 나라의 한 청년이 어느 나루터 여관에서 조선인으로 변장하고 두루마기 밑에 칼을 숨긴 일본인을 맨손으로 처단했다. 일인의 몸에서 나온 거금 800냥을 가난한 이웃에게 나눠 주라 이른 청년은 그 현장에 황해도 해주 텃골 김창수가 국모보수(國母報讐)를 위해 이 왜놈을 죽였노라고 방을 써 붙였다. 국모보수, 바로 민비(명성황후)가 일본인들에 의해 무참히 시해되고 당시에는 시신도 찾지 못한 치욕과 분노의 사건(을미사변, 1895)에 대한 복수였다. 이로 인해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나고 나라가 온통 들끓었던 해다. 김창수는 김구의 청년기 이름, 그의 나이 21세였다. 


김구는 일생의 스승이었던 유학자 고능선으로부터 이 나라는 망할 수밖에 없다. 그것도 더럽게 망한다 울분에 찬 훈시를 듣고 스승과 함께 눈물로 밤을 지새운다. 그리고 굳게 결심한다. 죽음으로써 나라에 보답(一死報國)하기로. 


마침내 기회가 온 것이다. 그러나 사람을 죽인다는 것이 쉬운 일이겠는가. 수십 번의 망설임 끝에 김구는 스승으로부터 각인된 평생의 경구(警句)를 되뇌며 최종 결심을 굳힌다. “절벽에선 붙잡은 나뭇가지마저 놓아버려라!” 그는 국모(명성황후)의 비참한 최후에 항거하는 조선인의 결기를 증명하기 위해 자기 목숨을 던지기로 마음먹는다청년 김구를 일약 전국적 인물로 만든 치하포 의거는 그렇게 탄생했다. 


국모보수는 안중근 의사가 그로부터 15년 후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하며 내세운 15개 이유 중 첫 번째였다. 을미사변은 그만큼 우리 민족에게 씻을 수 없는 치욕이었던 것이다.


이봉창, 죽음으로 영원한 쾌락을 얻다 


내 나이 31, 그동안 온갖 쾌락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이제부터는 영원한 쾌락을 얻고자 선생을 찾아왔습니다.” 일본인 행색의 노동자 이봉창이 첫 대면에서 김구에게 한 말이다. 그는 일본 천왕을 죽이겠노라는 결의를 밝혔고, 최소 1년의 준비 기간이 필요하다는 김구의 지침에 따라 때를 기다린다. 이따금씩 자기가 공장에서 일하며 번 돈으로  끼니도 거르는 가난한 임시정부 직원들에게 밥과 술을 대접하면서. 


그로부터 1년 후 첫 공작금이 이봉창에게 전해졌고, 며칠 지나 그는 김구를 다시 만났다. “선생이 허름한 바지춤에서 거금을 꺼내 제게 줄 때 눈물이 나더이다. 상해 조계(租界)를 한 발짝도 벗어날 수 없는 선생은 제가 이 돈을 아무렇게나 쓰고 달아나 버려도 어쩌지 못하겠지요. 내 평생 이런 신뢰를 받아보긴 선생이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반드시 대업을 완수하겠습니다.” 이봉창은 도쿄로 가 천왕에게 폭탄을 던지고, 그해(1932)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윤봉길, 역사의 시계바늘을 움직이다 


사나이가 뜻을 세워 집을 나서니 살아 돌아오지 않겠다(丈夫出家生不還).” 사랑하는 처자에게 이 글귀를 남기고 망명길에 오른 23세 청년 윤봉길. 그는 이봉창 의거 직후 김구를 찾아왔다. 그가 채소 장수를 하던 상해의 홍구공원이 스스로 목숨을 던질 곳이 될 줄이야. 


1932429, 역사의 날이 밝았다. 윤봉길은 김구가 미리 부탁해둔 동포의 집에서 마치 새벽 일하러 가는 농부처럼아침밥을 든든히 먹는다그러고는 거사 자금으로 산 새 시계를 김구의 헌 시계와 바꾸자고 한다. 자기는 앞으로 몇 시간밖에 필요 없다면서. 택시를 타기 전 윤봉길은 주머니를 털어 차비를 내고도 여유가 있으니 염려 말라면서 가진 돈을 김구에게 건넨다. 김구는 목이 메어 작별 인사를 한다. “훗날 지하에서 만납시다!” 


그날 홍구공원의 일본 천왕 생일 축하 및 상해사변 기념식은 윤봉길 의거로 인해 대한민국의 독립 투쟁을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된다. 미국인 피치 씨 부부 집에서 은신하던 김구가 성명서를 발표할 때까지 윤봉길은 갖은 고문 속에서도 배후를 밝히지 않았다. 두 눈을 가린 채 형틀에 묶여 원수의 나라 하늘 아래에서 총살당한 그의 품속에는 나무 십자가가 동행했다.


자기희생과 헌신으로 불쏘시개가 돼야 


위 세 편은 백범일지를 중심으로 엮어본 것이다. 김구와 이봉창윤봉길, 이 세 사람은 서울 용산 효창공원 안에 묘소가 모셔져 오늘도 지하에서 나라 걱정을 하고 계시다. 안중근 의사 가묘도 그 옆에서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전설적인 트로이 전쟁의 영웅, 반신반인(半神半人) 아킬레우스는 영원히 죽지 않는 편안한 길과 죽을 수밖에 없는 영웅의 길 중에서 후자를 택한다. 그렇듯 영웅은 죽어야 하고, ‘영웅적 죽음으로 생을 마감해야 비로소 영웅이 된다. 영웅 흉내만 내려 하거나 결과가 아닌 동기와 과정으로 영웅 대접을 받으려 해서는 일도 그르칠 뿐만 아니라 평도 나빠진다. 


바야흐로 남북 간에 새 시대 새 역사를 여는 영웅적(?) 대화가 시작됐다. 잘하면 한반도에서 세계가 주목하는 세기의 영웅이 탄생할 수도 있겠구나 싶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영웅은 반드시 사후(死後-事後)에 탄생한다는 것이다. 떡과 과일부터 챙기려 해서는 안 된다. 오직 나라의 안전과 국민의 행복을 위해 죽을 각오가 돼 있어야 한다. 온몸과 온 마음을 던져야 한다. 그래야 영원히 살 수 있고 영웅도 될 수 있다. 기회는 누구에게나, 또 언제나 오는 것이 아니다. 왔을 때 전력을 다해 매진해야 한다. 지금이 그 기회이다. 


그러나 그 앞에는 수많은 도전과 난관이 도사리고 있다. 지난 시대를 되돌아보며 결코 실패한 영웅들의 전철(前轍)을 되밟지 말아야 한다. 자기희생과 헌신이 없이는 성공도 못하고 영웅도 되지 못한다. 남북한의 평화 통일, 김구 선생이 역설한 나라의 완전한 독립이 영웅들의 애국심과 희생적 노력을 불쏘시개 삼아 마침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꿈꾸어본다.



[2018-05 서울대동창회 신문] 기사 원문 ☞ 바로보기 ☜ 클릭

Posted by 김형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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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24 동아일보]



김형오 “‘핵 머리에 이고 살 수 없다는 것 잊지 말아야



화정국가대전략 월례강좌 

23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동아일보사 부설 화정평화재단·21세기평화연구소주최 김형오 전 국회의장 초청 한국 정치, 나라를 지킬 수 있나월례강좌.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정치나 정치인이 나라를 지키지 않는다. 역사에서 그랬고, 이대로 가면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김형오 전 국회의장은 23일 동아일보 부설 화정평화재단·21세기평화연구소(이사장 남시욱)가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개최한 제7회 화정국가대전략 월례강좌에 참석해 시민들이 정치권을 견제하고 경고해야 한다며 이 같이 밝혔다.

  

23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동아일보사 부설 화정평화재단·21세기평화연구소주최 김형오 전 국회의장 초청 한국 정치, 나라를 지킬 수 있나월례강좌.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김 전 의장은 한국 정치가 대한민국을 망하지 않게 하고 국가를 지켜야 하는 것은 상식이지만 요즘 이 상식이 더 이상 상식이 아닐 수 있다는 염려와 불안감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 전 의장은 북한의 평창 겨울올림픽 참가를 놓고 정부에 상식과 원칙적인 대응을 주문했다. “북한의 목표는 분명하다. 김정은은 남북 대화와 평창 참가를 미국의 군사 옵션과 중국의 원유 공급 중단을 피할 수 있는 기회로 삼으려 할 것이라고 진단한 뒤 어느 한 순간도 우리가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불변의 명제는 오직 하나다. 그것은 핵을 머리에 이고 살 수는 없다는 것이라고 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둘러싼 한일 간 갈등에 대해 김 전 의장은 우방과는 진정성을 갖고 신뢰를 쌓아가야 한다. 국내 정치용으로 외교 문제를 이용한다는 의심을 받으면 국제무대에서 설 자리는 더 좁아지게 된다고 말했다.

 

청와대와 정부여당을 향해선 준비 안 된 개혁과 혁신보단 (점진적인) 개선과 보완이 낫다고 조언했다. 김 전 의장은 정책을 집행할 때 한쪽 면만 보고 계획을 수립하면 반드시 실패한다. 획기적인 처방일수록 예상 못한 부작용이 생기고 반발이 커진다고 했다.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 기조에 대해 김 전 의장은 양날의 검과 같다. 일방통행으로 몰아붙인다면 훗날 새로운 적폐의 부메랑으로 되돌아올 수 있다고 경고했다.

 

김 전 의장은 개헌을 통해 정치권이 혁신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1365일 중 320일 문을 열어 휴일을 반납한 채 국정에 매진했던 제헌의회 정신으로 돌아갈 때 국회에 대한 국민의 믿음이 살아날 것이라며 전 정권과 현 정권 간의 암투라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으려면 제왕적 대통령으로 출발해 식물 대통령으로 전락하고 마는 1987년 헌법 체제와 결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개헌으로 권력을 분산하는 길만이 제도적으로는 거의 유일한 해법이다. 그러려면 가장 중요한 것은 대통령의 열린 마음, 포용의 리더십이라고 강조했다.

 

 

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2018-01-24 동아일보] 기사원문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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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02 조선일보]



  "시장경제를 계획경제로… 대한민국 시계 거꾸로 돌려"




[개헌 자문위 보고서]

개헌 자문위 공동위원장 인터뷰

"약자 보호 시대적 요구는 알지만 과도하면 헌법 기본정신 놓친다"




국회 헌법개정특별위원회 자문위원회 공동위원장인 김형오〈사진〉 전 국회의장은 1일 "개헌의 필요성에 대한 국민적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 높지만 여야(與野)의 거듭되는 정쟁과 그 과정에서 나온 편향적 개헌안 때문에 발목이 잡혔다"며 "이제라도 헌법 개정안은 대한민국의 중·장기적 비전을 담아 미래를 보여줘야 한다"고 했다.





김 전 의장은 이날 본지 인터뷰에서 "이번 개정안이 시계열을 거꾸로 돌리는 국가 사회주의적 방향으로 갔다"며 이같이 밝혔다. 김 전 의장은 "신자유주의적 시장경제에 대한 저항으로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시대적 요구가 있는 것은 안다"며 "하지만 이것을 과도하게 반영해 헌법에 담아야 할 기본 정신을 놓쳐선 안 된다"고 했다.

김 전 의장은 "자유주의적 시장 경제와 창의·자율을 강조하는 대신 여러 조항에서 국가를 통한 시장의 규제를 과하게 강조했다"며 "시장 경제 우선 원칙이 없어지고 계획 경제로 나아가는 것은 본질은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는 격"이라고 했다.

김 전 의장은 "현재 우리나라는 대통령 단임제의 폐단이 곪아 전 정권의 정책은 무조건 지워져 버리는 단절 사회가 됐다"며 "개헌안에는 대통령 단임제로 잃어버린 국가의 중·장기적 비전을 강조하는 내용이 담겨야 한다"고 했다. 그는 "독립운동가와 6·25 전쟁에서 나라를 지킨 분들,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땀을 쏟았던 어르신, 그리고 민주화를 위해 희생·헌신했던 사람들의 정신을 균형을 담아 맞춰내는 것이 헌법의 정신"이라며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강자와 약자로 나누어 편 가르는 개헌은 안 된다"고 했다. 김 전 의장은 "무조건 개헌을 하지 않으려는 야당과 개헌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여당 모두 문제"라며 "개헌안을 이제라도 제대로 논의해야 한다"고 했다.



양승식 기자




[2018-01-02 조선일보] 기사원문 바로가기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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