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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오가 만난 세상/김형오의 문화 카페'에 해당되는 글 32건

  1. 2009.05.22 [국회보 5월호] 화제의 인물_김형오 국회의장
  2. 2009.05.06 5월의 사릉(思陵)에서



 지난해 가을 김형오 국회의장이 한반도 곳곳의 자연과 역사, 문화현장을 둘러보고 그 여정을 담아 책으로 펴냈다. 의장이라는 권위와 엄숙함을 내려놓고 시찰이 아닌 몸을 낮춘 국토순례자로서다. 오늘의 좌표와 내일의 비전을 제시하며 독자들에게 밤새워 쓴 편지다. 서간체여서 귀엣말로 속삭이듯 사근사근하다.



김형오 국회의장의 이력에는 수필가가 들어 있다. 정치인에게는 어울리지 않을 법하지만 1999년 등단했으니 올해로 10년째다. ‘돌담집 파도소리’란 수필집과 다수의 문집을 냈다. 평소 자신의 홈페이지에 댓글을 직접 달 정도로 누구와도 격의 없이 대화를 즐기는 김 의장에게 수필가는 정치인이 갖는 또 하나의 장식이 아니라, 시대와 발걸음을 함께 하겠다는 열린 마음의한 단면이기도 하다.


지난 가을 국정감사가 다가오자 김 의장은 고민하기 시작한다. 국회의원에게 국정감사는 의정활동의 꽃이지만 국회의장은 국회의원 중 유일하게 소속 상임위가 없다. 그래서 지난 20여 년간 국회의장은 국정감사 기간동안 해외 순방외교를 펼치는 것이 관례였다. 고민의 결론은 국토순례. ‘진실은 현장에 있다’는 믿음으로 우리 땅 생생탐방에 들어가게 된다. 한반도 구석구석을 발로 뛰며 현장의 살아 있는 목소리를 듣고 대한민국의 미래를 발전적으로 조망해보자는 취지를 담고 있다. ‘길 위에서 띄우는 희망편지’는 이렇게 시작해 탄생하게 된다.

 


대한민국 방방곡곡을 담은 현장의 목소리

김형오 의장의 간절한 바람이 담겨 있는 편지들은 결국 대한민국 국민 모두에게 띄우는 탐방보고서, 작은 희망과 행복의 메시지다. 이 책은 먼저 자연과 만남에서 시작된다. 국립 수목원, 천리포 수목원, 우포늪 등을 거치면서 자연에 대한 예찬을 담았다. 저자는 천리포 수목원을 세운 고 민병갈 선생께 띄운 편지를 통해, 평생 나무를 사랑한 한 사람을 애틋하게 기린다.우포늪 ‘철새들과 따오기’에게 보내는 편지는 마흔두통의 편지 중 유일하게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가 아니다.




새들을 의인화하여 보내는 이 편지에는 따오기 부부의 부부애를 사람들이 배워야 할 점이라고 소개한다. 철새를 향한 이 편지는 결국 이 땅에서 더불어 살아가야 할 존재들은 비단 사람에 국한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두 번째 테마는 문화현장이다. 저자는 이영 미술관, 국립중앙박물관, 안동한지 등 이 땅의 풍성한 문화를 찾아 간다.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은 김형오 의장은 그의 한국미술에 대한 혜안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특히 금동미륵반가사유상에 대한 그의 예찬은 남다르다. 눈을 지그시 감은 얼굴이 신비롭고 오묘한 느낌을 주는 반가사유상 앞에서 그도 ‘생각하는 사람’이 되고 만다. 그럼에도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은 이 반가사유상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믿고 걸어갈 때 길은 만들어진다.

역사와의 만남은 ‘생생 탐방기’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국보 32호 팔만대장경 목판이 보존된 해인사에서 저자는 팔만대장경을 보존하기 위해 불자들뿐만 아니라 종파를 초월한 종교와 모든 사람의 노력을 높이 평가하면서, 우리 소중한 유산을 후세에게 물려주어야 하는 일이 앞으로 남은 숙제임을 말한다. 수원 화성을 만든 다산을 당대의 ‘멀티플레이어’로 부르며, 아울러 다산의 애민정신을 본받아 정치인으로서의 올바른 자세를 되짚는다.


마지막 테마는 현재 한국의 밝은 미래를 위해 매진하는 일꾼들의 현장을 이야기한다.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 나로우주센터 등을 찾아 한국 사회 발전의 핵심동력이
될 기술연구에 매진하는 연구원들을 격려하고 힘을 불어 넣어주는 편지글을 띄운다. 이렇게 ‘길 위에서 띄운 희망 편지’를 읽으면서 생각나는 구절이 있다. 루쉰의 ‘고향’에 나오는 마지막 글귀이다.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믿고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국회의장이 넥타이를 풀고 발로 쓴 이 책이 국민에게 희망의 선물로 다가가기를 기대해 본다.

 
취재 김종해 홍보담당관실 자료조사관
사진 김진혁 홍보담당관실 촬영관

Posted by 김형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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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사릉(思陵)에서

당신께서 이곳에 묻히셨다는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왜 뱀 사(巳.蛇)자가 먼저 떠올랐을까요? 왜 생각 사(思)자가 생각나지 않았을까요. 지금에야 실토하지만 당신같이 비운의 인생을 산 여성에게 뱀을 떠올렸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당신께 늘 미안했습니다. 더구나 내 책*에서 당신에 대한 언급을 수시로 하면서도 책이 완성될 때까지 와보지 않았던 나의 게으름에 대해 늘 자책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내 책에서 가장 애틋한 마음으로 힘들게 쓴 부분이 당신과 당신 남편 단종과 관련된 것이지요.

 * ‘길 위에서 띄운 희망편지’라는 제목의 국토순례 에세이

(교보문고 종합순위 5위, YES24 종합순위 6위)

청량한 5월 첫 일요일 큰 마음먹고 당신을 찾아갔습니다. 한평생 그리움에 지쳐서 쉽게 눈을 못 감았을 당신, 당신은 서울 근교 금곡 근처에 조용히 묻혀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무슨 인연일까요. 이곳 사릉에서 불과 11Km 떨어진 곳에는 당신을 그렇게 만든 시숙 세조와 시숙모 정희왕후의 묘 광릉(光陵)이 있었습니다. 같은 남양주시 내에 불구대천의 인연이 함께 영면해 있다는 것이 너무나 안타깝고 마음이 짠합니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겠지요.

                           홍살문에 본 사릉 전경, 릉이 한눈에 다 들어올 정도로 작은 규모이다.
                                                           ⓒ 국회의장비서실

단종과의 혼사를 맺어준 세조(수양대군)가 2년후 단종과 생이별을 시켰던 그 원죄를 끝까지 묻기 위해 여기까지 오신건가요. 그러나 당신이 이곳으로 온 이유를 안 순간, 절로 고개가 떨구어 졌습니다. 한 많은 생을 마감한 이후, 죽어서도 낭군한테 가지 못하고 더구나 시신을 수습할 사람도 없었다지요. 그나마 당신의 시누이신 정혜공주 시가(媤家)의 도움을 받아 해주정씨 선산에 더부살이로 유택을 마련한 것이라고 하니 그 곤궁함은 말할수 없었겠지요. 이렇게 해서 광릉인근 지역에 오게 되었으니 인연의 끈은 참으로 모질기도 합니다. 그후 숙종 24년(1698년)에야 당신은 단종과 함께 복위되고 그때부터 능호를 사릉이라 불렀다지요. 그래서 사릉은 다른 왕릉과 달리 일반인의 묘가 철거되지 않고 함께 있는 이유일지 모릅니다. 죽은지 177년만에 왕후(定順王后)가 되신 이가 또 누가 있던가요.


겨우 산자락 몇 개를 사이에 두고 있는 광릉은 수목원 때문에 유명한 곳입니다. 광릉과 사릉, 같은 시대에 살면서 권력과 영화를 위해 피의 역사를 써야 했던 가해자와 그 피해자가 공존하고 있는 공간, 이들은 지하에서 지금쯤 어떤 대화를 하고 있을까요.

                                 사릉, 난간석과 무인석이 없고 규모도 일반봉분과 비슷하다
                                                           ⓒ 국회의장비서실

사실 광릉은 세조의 유언에 따라 검소하게 조성되었습니다. 조선초기 왕릉의 기준이 되었지요. 석실도 병풍석도 없고, 왕릉을 지키는 석수(石獸)도 호랑이와 양이 각 두쌍씩 얌전히 있습니다. 왕릉을 지키는 엄장함 보다는 민화에 나옴직한 정겨운 모습입니다. 봉분을 둘러싼 난간석이 그나마 권위를 지켜줍니다. 세조보다 15년후에 돌아가신 왕후릉은 좀 더 작은 모습으로 조성되었습니다.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이라 하여 제사를 모시는 정자각은 하나지만 왕릉과 왕후릉이 따로 조성되었습니다.

다른 왕릉보다 봉분도 낮고 크지 않았지만 산 높은곳에 조성함으로써 기품과 위엄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왕후릉은 광릉숲 전체를 조망하는 높은 소리봉을 안산으로 할 정도로 사위가 툭 트여 신록의 바다를 만끽할 수 있습니다.

                                            사릉 석수(석양) 규모는 작지만 생생하다.
                                                           ⓒ 국회의장비서실


솔직히 당신이 묻힌 사릉은 시숙내외의 빛나는 광릉에 비할 바가 못되었습니다. 아예 난간석이 들어설 공간조차 없습니다. 겨우 문인석으로 치레는 했지만 무인석은 아예 있지도 않고, 석수도 양과 호랑이가 조그만 덩치로 겨우 한쌍씩 외롭게 지키고 있을 뿐입니다.


호랑이(石虎)도 얼굴이 찌그러진 채 힘들게 서있는데 얼른 봐도 돌 자체가 그런 놈을 써서 별로 정성들이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솔직히 정자각 옆의 숙종때 하사된 비각이 ‘정순왕후 사릉’이라 말하지 않는다면 왕릉이라 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당신께선 조선조 왕비중에서 가장 슬프고 어려운 세상을 사셨습니다. 15세에 한살아래인 단종의 비로 간택되어 궁으로 들어왔을 땐 권력은 이미 수양대군의 손에 떨어진 후였습니다. 당신 편을 들어줄 대비도 대왕대비도 없었습니다. 하기야 세상 나온지 3일만에 생모가 돌아가시고 12살에 아버지(문종)를 여윈 남편 단종의 심정은 또 어떠했겠습니까. 2년간 왕과 비로서 소년부부가 함께 웃은 적이 몇 번이나 있었을까요.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갈 때 당신은 함께 하지도 못했습니다. 두분이 생이별한 청계천의 “영 이별 다리”는 “영영 건너가 버린 다리”라는 뜻의 영도교(永渡橋)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영도교 주변에서 염색업을 하며 근근히 생을 이어가는 당신께 동네 아낙네들이 채소전을 만들어 몰래 집안으로 먹거리를 넣었다지요. 얼마나 삶이 곤궁했겠습니까. 단종이 돌아가실 때 18세였던 당신께선 동대문밖에 초막(정업원, 지금은 청룡사)을 지어 흰옷과 소찬으로 평생을 보냈습니다. 매일 가까운 언덕에 올라 단종의 넋이 있는 동쪽 영월을 보며 그리워했습니다. 그곳이 바로 동망봉(東望峰)입니다.


                               광릉(정희왕후릉) 뒤편에서 바라본 전경, 난간석과 석물들.
                                                         ⓒ 국회의장비서실

                         광릉(정희왕후릉)의 석양(石羊) 석호(石虎)의 석수(石獸)와 문인석, 무인석.
                                                        ⓒ 국회의장비서실

 당신께선 82세에 생을 마감하셨습니다. 시숙모 정희왕후보다 22년 뒤에 태어나서 그 분이 돌아가신 후 38년을 더 사셨습니다. 조선의 비빈중에 가장 오래 사신분입니다. 단종임금의 몫까지 사신 것입니다. 그리움이 사무치면 천명(天命)도 모질어지는가 봅니다. 살아실 제 당신은 온 백성의 사랑을 받았고 이승을 떠나도 남편과 함께 추앙받고 있습니다. 생전에 일곱분의 임금이 저세상 가시는 걸 보면서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요. 감히 말씀드리자면 당신이 묻힌 사릉이 조촐하다고 서운하실 것 없습니다. 하늘에 떳떳하고 땅에 떳떳했으니까요. 반면에 세조부부는 어떠했습니까. 자식과 며느리가 일찍 죽고 본인들도 몹쓸 병에 시달리는 등 업보에 지친 삶을 살았던 것 아닙니까.

정순왕후님, 짧은 신혼이 영원한 이별로 이어졌는데 지금은 도솔천에서 3백리 떨어진 영월 장릉 주인 단종과 뜨거운 포옹을 하고 있겠지요.

                                                     사릉의 소박한 정자각과 비각
                                                           ⓒ 국회의장비서실

                                                        광릉의 5단 높이의 정자각
                                                            ⓒ 국회의장비서실


사릉과 광릉 정자각의 규모는 비각과의 비율로 추측이 가능하리라.
우측 멀리 정희왕후릉이 보인다.


광릉(光陵)과 사릉(思陵), 역사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곳, 영욕과 성쇠의 철리(哲理)를 깨닫게 할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눈부시게 빛나는 5월 이곳에 오니 한편의 시가 떠오릅니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중략)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 국회의장비서실 

요새 사람들은 너무나 바쁘게 사는 것 같습니다.
사릉이라도 한 번 가서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해보는 것도 멋진 일이겠지요.
왕비님, 낭군님과 영원히 행복하세요.

  

ⓒ 자료출처

 글 : 김형오

사진 : 국회의장 비서실

Posted by 김형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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