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어렸을 때 일입니다.
당시 아이들 사이에서는 '홍콩 할매(?)의 비밀'이라고 '이 비밀을 모두 아는 사람은 홍콩할매가 찾아와 죽인다'라는 괴담이 퍼졌었죠.
기억 속 괴담은 '밤 12시 화장실 거울을 보면 내가 아닌 다른 존재, 즉 귀신을 보게 된다', '밤에 화장실에 가면 귀신이 너의 머리카락을 다 세기 전에 나와야 살 수 있다' 등 뭐 이런 이야기였습니다.
어린 저에게 이 괴담은 '캄캄한 밤'과 '12시를 가리키는 시계', '화장실', '거울' 등을 공포의 대상으로 인식시켰고 어느새 저에겐 밤에 화장실 가야하는 상황이 세상에서 가장 공포스러운 일이 됐습니다.
당시 저는 밤에 화장실 가는 것이 너무 무서워서 자기 전 절대 물을 마시지 않았고 혹시나 꼭 가야 할 상황이 발생할 때에는 눈을 감은 채 온 집안의 불을 다 켠 후에야 갈 수 있었습니다.
또 밤 12시 종이 울릴 때에는 절대 이불 밖으로 나가지 않았고 밤 12시를 피해 화장실에 가게 되면 거울은 절대 쳐다보지 않았습니다.
너무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일상 속 상황이 저에겐 꽤 오랫동안 공포로 지속됐습니다.
전혀 무섭지 않은, 그래서 더 무서운 공포영화, 파라노말 액티비티입니다.
천재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가 선택한 공포, '파라노말 액티비티'는 너무나 평범한, 그래서 지루하기까지 한 일상이 최고의 공포가 되는 순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케이티와 미카는 함께 동거 중인 평범한 연인입니다.
8살 때부터 자신의 주위를 맴돌던 정체불명의 존재를 느껴왔던 케이티를 위해 미카가 그들의 일상을 24시간 카메라에 담으면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너무나 평범한 연인인 케이티와 미카. 케이티와 미카를 연기한 배우들도 역시 너무나 평범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 영화는 정말 호불호가 극과 극으로 갈리는 영화입니다.
어떤 이에게는 이 영화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영화인 반면 어떤 이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지루한 영화이기도 하죠.
무서운 영화광인 저에게도 초저예산인 영화가 입소문만으로 박스오피스 1위에 오르고 스티븐 스필버그가 영화를 본 후 직접 저작권을 구입해서 마지막 10분을 다시 촬영했다는 이야기에 이 영화에 대한 기대가 매우 컸습니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저는 '뭐야 그래서 무서운 장면은 언제 나오는건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솔직히 영화는 무섭지 않았습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든가', 아니면 '문이 조금 움직인다든가' 등 어떻게 생각하면 별 일 아니라고 넘어갈 수 있는, 일상 속에서 접할 수 있는 그런 상황들이 계속 이어졌으니깐요.
직접적으로 귀신이 보이거나 하지 않습니다. 파라노말 액티비티는 정말 고요한 공포영화입니다.
마지막 순간에 '헉' 하는 부분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크게 무섭지는 않았습니다.
'뭐야, 하나도 안 무섭구만... 실망이다.'
저는 영화에 크게 실망한 채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렇게 여느 날과 다름없는 일상을 보낸 후 불을 끄고 잠자리에 들려는 순간이었습니다.
잠자리에 누워 잠시 그 날 본 영화 '파라노말 액티비티'에 대해 생각을 하다보니 갑자기 어릴 적 '홍콩할매의 비밀' 괴담과 함께 그 당시 느꼈던 공포가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파라노말 액티비티, 영화 자체는 정말 무섭지 않았는데 갑자기 그날 밤 저는 최고의 오싹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너무나 평범한, 한번쯤 겪었을 법한 영화 속 상황들을 나의 현실에 대입하는 순간 지루한 이야기가 최고의 공포로 바뀌었습니다.
파라노말 액티비티는 괴담 전설의 법칙을 잘 따르고 있습니다.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일상이 공포가 될 수 도 있다는 것을 입소문으로 퍼트리는 것입니다.
결국 그 어떤 공포영화보다 무서운 것은 바로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일상일테니까요.
Posted by 포도봉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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