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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장실록(제도개선등)/그건 이렇습니다

‘성경 인용 궤변’과 ‘황당한 비유’?

읽기 전에 잠깐…내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이유

중앙일보는 9월 1일자 및 2일자 지면의 상당 부분을 할애해 강용석 의원을 변호한 나에 대한 격렬한 비난으로 채웠습니다. 기사, 해설, 취재 일기, 만평, 칼럼은 물론 사설까지 동원해 신랄하게 나를 비판했습니다.

상당 부분이 사실을 왜곡‧과장했으며, 사리에 맞지 않는 지적들이 많아 독자들로 하여금 적잖은 오해를 하게 했고 나는 엄청난 비난에 시달렸습니다.

나도 국민 정서를 모르지 않고, 강 의원의 잘못을 두둔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뒷수습도 안타까울 정도로 미숙했고 원성을 사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런데 본의 아니게 나는 국회 발언 이후 그의 '취중 실언'을 포함해 사후 처신까지도 옹호하는 사람처럼 비쳐졌습니다. 트위터와 일부 언론의 책임도 없지 않습니다. 중앙일보는 그 최일선에 섰습니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란 걸 압니다. 거대 언론을 상대로 억울함을 호소하고 시정하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무모한 일인가를 잘 알지만 나는 명예 회복 차원에서 있는 그대로를 말하려 합니다.

나는 싸움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손상된 나의 명예를 되찾고 사실과 진실을 알리려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중앙일보가 이 문제로 나를 또 괴롭힌다면 나는 이번 사건과 2년여 전 나를 인격적으로 매도했던 사건을 함께 묶어 대응할 것입니다. 저에 대한 비난 내용이 많아 4편으로 나누어 사실과 다른 내용을 바로잡고자 합니다. 여러분의 많은 이해와 협조를 바랍니다.
  

 

중앙일보 기사와 논평에 대한 반론 ①
“객관성과 균형감각은 어디로 갔는가”

   

김형오


‘성경 인용 궤변’과 ‘황당한 비유’?

  “예수가 한 마을을 지나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광장에서 한 여인을 둘러싸고 욕하며 돌을 던지고 있었다. 간음한 여인이라고 했다. 예수가 나서서 말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 이 여인을 돌로 쳐라.’ 사람들이 찔끔해서 돌을 놓고 슬금슬금 물러서는데 웬 중년 아줌마만 줄기차게 여인에게 계속 돌을 던졌다. 남이 버린 돌까지 주워 던졌다. 예수가 한동안 난감한 표정으로 지켜보다 말했다. ‘엄마, 이제 그만 좀 하세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원죄(原罪)조차 없는 순결한 성모(聖母)로 보는 천주교 신자들 사이에 전해지는 우스갯소리다. 우리 국회에는 온통 마리아만 모여 있는가. 아니면 성희롱․성폭행범들의 집합체인가. 국회의원 배지 디자인을 당장 전자발찌 모양으로 바꿔야 할 판이다.”  <노재현의 '미꾸라지보다 나쁜 메기'에서>


조금 길지만 인용한 부분은 중앙일보 9월 2일자 34면 ‘노재현의 시시각각’이란 칼럼에 실린 글입니다. 나는 이 대목을 읽으며 정말 아연실색했습니다. 삼류 잡지도 아닌데 어찌 이런 비유가 일류 중앙지에 실릴 수 있을까요? 이거야말로 중앙일보 식으로 비판한다면 ‘견강부회’, ‘황당한 궤변’이 아닌가요? 나의 성경 인용을 비웃고 비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동원된 비유라 하더라도 너무나 부적절합니다. 상식을 의심하게 만듭니다. 코미디도 이런 블랙 코미디가 없습니다. 오랜 천주교인이며 유머와 농담을 즐기는 지인에게 물어 보았더니 자기도 처음 듣는 얘기라면서 황당해 하더군요. 설혹 일부 천주교 신자들 사이에서 우스갯소리로 떠돈다 하더라도 이를 활자화 시키는 건 문제가 있습니다. 더구나 성희롱 문제에 매우 엄격한 중앙일보가 말입니다. 아무리 유머의 탈을 쓰고 있더라도 이는 명백한 성경 모독이고 예수와 성모 마리아에 대한 모욕입니다. 강용석 의원의 발언에 성적 수치심을 느낀 사람은 그 자리에 참석한 극소수인 반면, 이 글을 읽은 수많은 독자들이 모욕감을 느끼지 않았겠습니까?


첫째, 이 예화는 예수가 말한 ‘죄 없는 자’를 ‘간음한 죄가 없는 자’로 한정 짓고 있습니다. 그 뒤에 나오는 ‘순결한 성모’, ‘성희롱․성폭행범’, ‘전자발찌’ 등이 그 논거를 뒷받침해 줍니다.

둘째, 돌을 던진 아줌마가 성모 마리아라면 이 또한 모순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일반인들도 차마 못 던지는 돌을 왜 성모님이 던지겠습니까? 돌을 던지는 순간 그녀는 죄인인가요, 아니면 원죄조차 없는 순결하신 성모님인가요?

셋째, 우리 국회에 모여 있다는 마리아는 누구고, 성희롱․성폭행범은 누굽니까? 전자는 죄가 없어 제명안에 찬성표를 던진 의원들이고, 후자는 성희롱․성폭행 죄를 지어 반대표를 던진 의원들인가요?
이 칼럼의 논리적 모순성은 '우리 국회에는 온통 마리아만 모여 있는가. 아니면 성희롱·성폭행범들의 집합체인가'라는 문장에서도 쉽게 발견됩니다. '국회의원들은 모두가 마리아거나, 아니면 모두가 성희롱·성폭행범들'이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법적·논리적 어불성설의 극치입니다. 결국 마리아를 성희롱·성폭행범들과 동격으로 놓는 심각한 오류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넷째, 전자발찌 모양의 국회의원 배지는 그럼 후자들만 달아야 하나요? 아예 평생 가슴에 달고 다니는 ‘주홍 글씨’처럼 주홍색으로 칠하면 더 좋지 않을까요? 130여 명의 국회의원은 모두 성희롱․성폭행범이어서 강 의원에게 돌을 던지지 못한 거라고 단정 짓는 그 논리가 너무나 황당해서 나는 실소를 금할 수가 없습니다.

‣ 그런가 하면 중앙일보 9월 1일자 2면 헤드라인은 ‘궤변’이란 표현을 써가며 직접 실명으로 나를 겨냥했습니다. “강용석에게 돌 못 던진다? …김형오, 성경 인용 궤변”

상단 전체를 제목으로 뒤덮은 9월 1일자 중앙일보 2면(노란박스)

이례적으로 신문 맨 위를 온통 제목으로 가로지르며 뒤덮었습니다. 중앙일보 애독자인 나도 이렇게 특정인의 실명을 써가며 신랄하게 비난하는 제목은 본 기억이 별로 나질 않습니다. 바로 3년 전 미디어 법 직권상정을 하지 않는다고 대문짝 만한 제목으로 저를 비난했던 적 말고는 말입니다. 중앙일보를 제외한 어떤 언론도 한 면 전체를 특정인의 이름을 직접 써 붙여 비난하는 제목으로 다루지는 않았습니다. 이게 과연 객관적인 태도인가요? 아무리 편집권에 자유가 있다 해도 너무 한 거 아닌가요? 아무리 못마땅하더라도 나를 궤변론자로 낙인찍어야 속이 시원한가요? 일류지 맞나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습니다.

내가 ‘성경 인용 궤변’을 했다고요? 이는 내 발언 중 다음 부분을 지적하며 쓴 기사입니다.

예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 가운데서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간음을 하다가 잡힌 여자를 끌고 와 돌로 쳐 죽이려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던진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둘씩 자리를 떠났고 마침내 혼자 남은 예수는 여인에게 말합니다. “나도 너를 정죄(定罪)하지 않는다. 가서,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저 또한 묻고 싶습니다. “정말로 여러분은 강용석 의원에게 돌을 던질 만큼 떳떳하고 자신 있는 삶을 살아오셨나요? 그에게 돌을 던질 수 있나요?”

고백하건대 저는 돌을 들 수가 없습니다. 던질 수가 없습니다. 그럴 만한 자격도 없으려니와 그는 이미 만신창이가 되도록 돌팔매질을 당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아직도 사법적 심판이 진행되고 있지 않습니까.


 

나의 이 발언이 성경을 인용한 ‘궤변’인가요? 무슨 근거로 제목을 그렇게 뽑았나요? 정작 기사 본문을 보면 ‘궤변’이란 단어는 물론 그 어디에도 내 말이 왜 궤변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조차 눈을 씻고 보려 해도 단 한 줄도 없습니다. ‘궤변’이라고 제목을 손바닥 만하게 붙였으면 최소한의 설명이라도 해 놓아야 하는 것 아닌가요? 이렇게 감정적이고 선동적인 경우가 또 있었는가 싶습니다. 이거야말로 궤변 아닌가요?

참고로 “여러분은 강 의원에게 돌을 던질 만큼 떳떳하고 자신 있는 삶을 살아오셨나요?”란 말은 후술하겠지만 국회 폭력을 비롯한 공적 활동에서의 부끄러운 행위들을 상기시키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