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국회의장실록(제도개선등)/그건 이렇습니다

강 의원을 YS로 둔갑시켜 버렸다?

중앙일보 기사와 논평에 대한 반론 ②
“객관성과 균형감각은 어디로 갔는가”

 

김형오

 

강 의원을 YS로 둔갑시켜 버렸다?


민주주의는 다양성이 그 생명입니다. 우리 국회에도 다채로운 목소리들이 존재합니다. 나는 나와 의견이 다르다는 이유로 타인을 폄훼하거나 배척하는 일을 늘 경계해 왔습니다. 이번 국회 발언도 내 양심을 걸고 소신을 얘기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내 발언을 획일적인 시각으로 재단한 기사들을 보면서 당혹스러움을 느껴야 했습니다.
 
‣ 9월 1일자 중앙일보 2면 기사 중간에는 이런 발문이 돌출돼 있습니다. “‘79년 YS 제명’ 황당한 비유”

9월 1일자, 중앙일보 2면 기사 일부


그래 놓고 기사에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김 의원은 강 의원을 민주화 운동을 하던 시절의 YS로 둔갑시켜 버렸다.”

참으로 황당하기 짝이 없습니다. 달은 보지 않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본 건가요? 그날 내 발언은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1979년 10월 4일, 우리 국회는 헌정 사상 처음으로 김영삼 당시 신민당 총재를 국회의원직에서 제명했던 오점을 남겼습니다. 최초면서 유일한 경우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자리에서 그 부끄러운 역사를 되풀이할 생각이십니까?


내가 언제 ‘강 의원을 민주화 운동을 하던 시절의 YS로 둔갑시켜 버렸’는지요? 오독인가요, 의도적 왜곡인가요? 일류 신문의 정치부 기자가 만약 행간을 잘못 읽어 의미를 잘못 전달했다면 망신스런 일입니다.

물론 청중이 동료 의원들인 만큼 발언의 배경과 의도는 생략돼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사를 배우고 독해력이 뛰어난 고등학생 정도라면 내 발언의 속뜻이 ‘YS 제명은 독재 정권 시절 여당 의원들만의 비공개 회의에서 40초 만에 날치기 통과되었지만, 개개인의 자유 투표가 보장된 지금 강용석 의원 제명안을 헌정 사상 두 번째로 가결시킨다면 부끄러운 일이다’라는 것쯤은 어렵지 않게 이해했을 겁니다. 곧 제명의 대상이나 사유가 아닌 투표의 주체와 환경, 그리고 행위의 정당성을 두고 한 발언인 것입니다.

‣ 이 기사의 마지막 문장 또한 저의가 의심스럽습니다. “‘이 정도 일로 제명하면 우리 중 남아 있을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김형오 의원)며 속마음을 드러냈다.”

 ‘이 정도 일로(나는 ‘이만한 일로’란 표현을 썼습니다)’만 해도 그렇습니다. 그 앞에 ‘국회 폭력, 폭언, 기물 파손, 멱살잡이, 집단 떼 싸움 등 헌정 질서를 교란한 부끄러운 사건들과 강용석 사건보다 결코 가볍지 않았던 다른 성추행․성희롱 같은 사건들은 뒤로 한 채 사석에서 저지른 잘못이며 죗값을 톡톡히 치르고 있는데도’란 말이 생략돼 있다는 걸 모를 리 없지 않습니까? 나는 공개회의라 믿었기에 전직 국회의장으로서 '내 얼굴에 침 뱉기’ 격인 국회의 부끄러운 자화상을 말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국회 방송에조차 안 나가는 비공개 회의란 걸 알았더라면 보다 직설적인 표현을 썼을 텐데, 이 대목이 가장 아쉽습니다. 그런데도 ‘속마음을 드러냈다’는 식으로 마치 내가 강 의원의 죄가 가볍거나 아예 없다고 주장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게 만들었습니다. 중앙일보는 앞서 내가 언급한 낯 뜨거운 불법 행위들에 대해서는 왜 제명하라고 질타하지 않았는지요? 더구나 그것들은 공적인 장소에서 공개적으로 일어났는데도 말입니다.

미묘한 차이지만 원래 내가 말한 ‘과연 얼마나 될까요?’도 ‘누가 있겠느냐’로 바뀌어 있습니다. 전자가 ‘얼마 안 될 것이다’란 뜻이라면, 후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란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소수(少數)’와 ‘전무(全無)’의 차이입니다. 어쨌든 그건 상관없습니다, ‘자성하자’는 뜻에서 처음부터 과장법으로 쓴 표현이니까요.

그러나 트위터에만 의존하지 말고 내게 원문을 요구하거나 전화로 취재하는 정도의 성의만 보였어도 이 같은 실수(?)는 나오지 않았을 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