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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헤드라인

[경남중고 동창회보 198호] [용마열전] 세상을 빛낸 동문들 " 김형오(20회) 전 국회의장"

‘비움’과 ‘내려놓음’이 몸에 밴 청아한 선비형 정치인

 

5선 의원, 국회의장 마친 뒤 아름다운 퇴장

약자에게도 따뜻한 시선…이제 작가의 길로

 

타고난 약골체질 철저한 자기관리로 극복

회심의 역작<술탄과 황제> 서점가 돌풍 일으켜

 

김형오 동문의 마포 연구실에 걸린 ‘실사구시(實事求是)’ 표어 액자.

김 동문이 중국 텐진(天津)대학 명예박사 학위 수여 때 받았던 기념 액자다.

이 액자엔 사연이 있다. 김 동문의 국회의장 시절 중국 후진타오(胡錦濤) 주석 초청으로 방중 면담이 계획됐다가

후 주석의 급한 일정 때문에 약속이 펑크났다. 얼마 후 외교라인을 통해 죄송하다는 사과문와 함께

다시 초청을 하고 싶다는 전갈이 왔다. 김 동문은 “안간다. 박사학위나 주면 몰라도”라며 짐짓 거절했다. 

당시만 해도 한국이 중국에 큰소리 칠수 있던 시절. 그러자 후주석 측이 국무원 동의까지 필요한

명문대학 명박을 부랴부랴 주선했다는 것이다. 

텐진대 명예박사 학위는 중국 원자폭탄의 아버지라 불리는 위민(于敏)외에 김 동문이 유일한 수여자다.

 

 

2011년 8월31일 부산시청 기자회견장. 전 국회의장 김형오(20회)동문이 기자들 앞에 서서 상의 안 포켓에서 준비해온 원고를 꺼내 읽어 내려갔다. “이번 18대 의원을 끝으로 정치계를 떠납니다.” 차기 총선 불출마 선언이었다.

 

회견장이 웅성거렸다. 어떤 기자도 예상 못한 내용이었다. 정치권도 크게 술렁였다. “차기 총선, 때 이른 물갈이 시작”, “5선 국회의원에 의장까지 했으니 물러나는 것은 자연스럽다”, “자리에 연연않고 떠나는 원로다운 면모” 등 긍정평가에서부터 “당이 어려울 때 자신만 독야청청 피신하느냐” 는 냉소적인 비판까지 다양한 반응이 나왔다. 심지어 “돈 먹다 걸렸나”, “건강에 문제가 있나”등 의심의 눈초리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태평했다. 훗날 한 기자에게 “20여년 짊어져 온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홀가분했다”, “그동안 가슴 깊이 품어온 작가로서의 삶을 시작한다는 설레임으로 들뜬 기분이었다”는 등의 당시 심경을 회고한 바 있다. “나를 정치인으로 키워주고 국회의장까지 하게 해준 부산에서 마지막 정치 작별인사를 하는 게 도리”라서 부산을 택했다고 한다. 그는 근래 최연소 국회의장(만61세)이었고 국회를 떠날 때가 만 65세였으니 여러 말들이 나오는 것은 당연했다.

 

그로부터 8년 뒤인 지난 9월5일 국회도서관 1층 중앙홀. 개인소장 도서 2000여점, 자료·문건 5000여점과 국회의장 재직시 외국 VIP들로부터 받은 선물 178점을 국회 도서관에 기증하는 ‘기증자료 특별전’ 개막식에서 김형오는 다시 한번 만장한 기자들 앞에 섰다. “오늘 이 자리가 공인의 삶, 공적인 신분, 공직자가 어떤 길을 가야하는가 고민하는 분들에게 저의 작은 행동이 느낌표 하나를 찍어줄 수 만 있다면 좋겠다”고 인사했다.

 

한국 서정시의 한 획을 그은 시인 이형기(1933~2005)는 주옥같은 시를 많이 남겼지만 그중에서도 ‘낙화(落花)’는 문학인들로부터 가장 많이 사랑을 받는 대표작이다.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중략)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할 때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날” 인생의 낙조, 또는 퇴장의 미학을 떨어지는 꽃잎에 은유해 표현했다. 그래서 정치인, 경제인, 사회인 등 지도층의 귀거래사 뒤에는 이형기의 이 낙화 시가 자주 인용된다.

 

한수이남 최고의 명문인 경남중고가 70여개 성상동안 배출한 국가의 동량, 각계 각층의 지도자급 스타들은 밤하늘의 별들처럼 셀 수없이 많다. 동아일보 기자로 언론계에서 출발해 관계를 거쳐 5선 국회의원을 하고 국회의장을 끝으로 은퇴한 김형오 동문도 찬란한 빛을 발하는 그 별들 중 하나다.

 

김 동문은 정계에 몸담은 기간 좌우에 크게 치우침이 없이 정도를 밟아왔고 시대정신에 발맞춰 민주주의의 기틀을 공고하게 다졌다는 평판을 듣고 있다. 그의 정치적 삶이 격동의 한국 정치사에서는 드물게 클린했다는 점, 그리고 그의 퇴장이 가야할 때를 알고 떠나는 낙화의 뒷모습처럼 아름다웠다는 점도 국민들로부터 높은 평가와 존경을 받는 배경중 하나다. 특히 내년 총선을 앞두고 여야 정치인들의 볼썽사나운 자리다툼이 국민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고 있는 현 시국에서 김 동문의 그런 ‘비움의 행적’은 찬연히 빛나는 귀감으로 더욱 돋보이는 상황이다.

 

김형오 동문은 요즘 칼럼니스트로 활약중이다. 주요 언론매체에 간헐적으로 정치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문재인(25회) 정권의 잘못을 정중하지만 날카롭게 지적하고 때로는 자신이 몸담았던 보수야당을 향해 따끔한 질책을 가하기도 한다. 얼마전 문화일보는 18~19면 양면을 통털어 김 동문과의 인터뷰 내용을 실었다. 여기서 김 동문은 지소미아 등 외교정책과 경제정책, 검찰개혁과 교육문제 등을 통렬하게 비판했다. 그는 “현 정부가 (의욕이 앞서)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나라를 만들고 있다”며 불안감을 나타내면서 5년 후배인 문대통령에게 “서운하다 생각하지 말고 (권한을) 내려놓고 비워놓는 준비를 해야한다”고 충고했다. 이명박, 박근혜 때도 바른소리 한다고 밉보였는데 마음을 완전히 비운 지금 나라 위해 무엇을 망설이겠느냐는 것이다.

 

김형오 동문은 경남 고성 산(産)이다.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거주하시던 부모님이 해방과 함께 1남2녀(김 동문의 두 누나와 형)를 데리고 귀향한 직후 태어났다. 김 동문은 태어날 때부터 약골이었다고 한다.

 

밖에 나갔다 하면 넘어지고 긁히고 터지고 째지기 일쑤였다. 걸핏하면 감기 몸살 등을 앓았다. 의료시설은 커녕 약국도 제대로 없던 시절인지라 부모님은 언제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자식으로 치부하며 불안해했다고 한다.

 

그래도 ‘기신기신 살아남아’ 나이가 찬 김 동문은 시골 읍내의 고성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지각과 결석을 밥먹듯 했다. 6년 동안 개근상과 전근상 한번 받아보지 못했고 소풍가는 날도 자주 아파 빠진 적이 많았다. 시골아이들의 일대 로망인 도시(부산)로의 수학여행은 언감생심이었다. 자연히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았다. 같은 또래의 친구들이 모두 등교한 이후 김 동문은 방에 드러누워 형과 누나의 교과서를 비롯해 집에 있던 책이란 책은 죄다 읽으며 소일했다. 장화홍련뎐, 춘향뎐, 홍길동전 등 고전소설은 그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초등학교 3학년 즈음엔 신문을 보기 시작했다. 어려운 한자도 있었으나 아버지와 어머니께 물어보며 세상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인생 새옹지마라 했던가, 아니면 전화위복이라 해야 하는가. 김 동문의 이런 허약체질이 그에게 깊고 넓은 지식을 선물했다. 동아일보사에 입사해 기자로 활약하고 외교부 산하 외교안보연구원에서 연구관으로 돋보이는 활동을 했으며 정계에 입문, 유권자를 향해 호소력 있는 메시지를 던질 수 있었던 것은 다 이 당시 쌓았던 교양 덕분이었다. 게다가 은퇴 후 작가로서의 삶을 새로 시작하면서 <술탄과 황제>라는 대작을 생산할 수 있었던 것 역시 어렸을 때부터 다져놓았던 방대한 독서량이 없었다면 불가능 했을 것이다.

 

그렇게 결석이 잦았음에도 성적이 우수해 경남중학교에 지원, 합격했다. 시험치러 부산으로 가면서 처음으로 버스를 탔고, 기차·전차를 구경한 것도 이때가 처음이었다. 누나와 함께 서대신동 산 중턱에서 자취를 하면서 살았다. 쌍백선 교복을 입고 등교한 첫날 에피소드 하나. 입학식을 마치고 귀가하는 도중 도회지 부산의 풍물이 신기해 주위를 두리번거리느라 길을 잃었다. 걸어서 30분이면 닿을 거리를 이러저리 헤메느라 너댓시간이나 걸렸다. 해거름에 집에 도착하자 누나가 큰 걱정을 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길을 잃었다고 하자 “전찻길만 따라오면 되는데” 라며 촌뜨기 동생의 주변머리 없음을 나무랬다. 큰 길에서는 우리집이 있는 산이 보이고 올라가는 골목 입구도 쉽게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야 알았다.

 

당시 토성동에 소재한 경남중학 담벼락에는 만화가게와 책방이 있었다. 여기서 김형오의 독서 본능이 물만난 고기처럼 발휘됐다. 중1, 중2 때 당시 삼국지 수호지 열국지, 통일천하 등 이른바 지(志)자 류 고전을 밤을 새워 읽었고 중3 때는 세익스피어 전집 등 서양의 문학작품까지 섭렵했다. 성적은 그런대로 상위권에 속했다. 중3 때 김형오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같은 반이었다. 김 동문은 “당시 모르는 문제가 나오면 즉각 승태한테 물어봤는데 정말 빨리, 그리고 자상하게 풀이를 해줬다”며 회고한다.

 

덕분인지 경남고는 매우 좋은 성적으로 입학하여 구덕산 덕형관 캠퍼스에서 그런대로 보람찬 학창시절을 보냈다. 성적도 성격도 무난한 탓에 동기 친구들과도 깊은 우정을 나눴다. 고2 가을에야 그는 초·중 때 못가본 수학여행을 처음으로 맛본다. 그런데 운명의 고3때였다. 아버지의 권유로 당시 소문난 이비인후과에서 비염 수술을 받았다. 그런데 무슨 혈관을 잘못 건드렸는지 피가 멈추지 않았다. 양 콧구멍에 아기 주먹 만큼한 지혈제 솜을 틀어막은 상태로 영도 집에 돌아왔으나 피는 계속 줄줄 흘러 세숫대야로 받아 내야 할 정도였다. 얼굴의 일곱 구멍에서 피가 쏟아졌다.

 

이때 김형오 군은 죽음을 생각했다. “한창 피를 쏟아내고 나니 마음이 가라앉고 편안해졌다”고 회고하는 김 동문. 이후 그의 인생을 관통한 비움과 내려놓음은 그때 깨달은 삶과 죽음의 철학에서 비롯된게 아닐까 싶다. “1965년 5월16일 토요일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바로 4년 전 5.16을 일으킨 날이었으니까”.

 

피는 멎었으나 몸은 엉망이 됐다. 60kg 이상 나가던 체중이 43kg으로 줄어들었다. 몇 달을 학교에 가지 못했다. 근 4달 책 한권 보지 못하고 들어누워 있다보니 성적이 뚝 떨어진 것은 당연했다. 휴학을 신청했다. 하지만 담임이던 ‘악한’ 박태현 선생님이 적극 만류했다. 영도 우리집으로 직접 오셔서 “형오 실력이면 서울법대도 들어 갈 수 있습니다.”라고 장담했다. 기분이 좋아진 부모님, 담임의 권유대로 서울법대에 지원했지만 보기좋게 낙방했다.

 

결국 김형오는 재수를 결심했다. 건강을 회복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판단하에 영도 영선동 집에서 태종대 입구까지 2km정도의 거리를 매일 조깅했다. 처음엔 숨이 차서 몇 번을 쉬어가며 겨우 다녔다. 하지만 한 달 두 달 걷다 보니 나중엔 뛸 수도 있었다. 자형은 김형오의 건강회복을 축하하며 제주도 여행을 선물했다. 이때 난생 처음으로 페리를 타고갔다. 오는 날은 풍랑을 만나 지축이 흔들리는 경험을 한다. “12시간 내내 배멀미를 했던 것 같다”고 김형오는 회고한다. 그래도 그의 첫 해외(?)여행은 회복한 건강 덕분에 무사히 끝났다.

 

김형오의 관리 능력은 건강에 이어 학업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6월경 서울에서 제일 좋다던 양영학원에서 재수를 하던 친구의 권유로 편입시험을 치렀는데 그 친구가 시험에 나올만한 수학문제 몇 개를 알려준 덕분에 합격할 수 있었다. 그러나 두 달 후 1학기 종합성적은 184명 중 182등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김형오의 도전의식이 강하게 발동한다. “이럴 순 없다”며 자기 나름의 학업 계획을 세웠다. 하루 일과와 각 과목 진도 스케줄을 촘촘하게 짰다. 8월 하순부터 12월 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스케줄대로 1분1초도 어긋남 없이 실천했다.

 

그 결과 학원의 최종 성적으로 10위권에 들었다. 서울 법대도 너끈히 지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고시공부하다 몸 상한 사촌형의 사례를 목도하면서 서울 문리대에 원서를 냈다. 당초 정치과를 희망했으나 데모꾼이 될 것을 우려한 부모님의 강권에 따라 외교과로 지망을 바꿨다. 외무고시엔 흥미가 없었다. 외교학을 배우면서 국제정치에 관한 식견을 가다듬었고 모택동·레닌 관련 혁명) 서적도 열심히 탐독했다. 나중에 보수당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도 진보 이념에 적지 않은 심퍼시를 가지게 된 것은 학부시절 접했던 그런 서적들 덕분이었을 것이다.

 

김형오 동문은 작년 7월23일 공교롭게도 같은 날 자신이 좋아하던 두 사람을 하늘나라로 보내 염천에도 불구하고 검은 상복을 입고 연이틀 상가를 찾았다. 한명은 생전에 인격적 교류를 나눴던 고 노회찬 정의당 의원이고 다른 한명은 젊었을 때부터 그의 작품에 매료됐던 소설가 최인훈이었다. 최인훈은 좌우 이데올로기의 틈바구니에서 고뇌하는 젊은이를 그린 <광장>과 <회색인> 등으로 김승옥, 이청준 등과 함께 60~70년대 대학가를 풍미한 한국의 대표적 작가였다. “신동아 기자시절 원고 청탁을 위해 몇차례 최 작가를 만나는 기회를 가져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고 말하는 김형오 동문. “특히 <광장>은 1960년대 벽두에 통행금지 해제를 알리는 새벽 4시의 사이렌 소리처럼 잠든 나의 의식을 뒤흔들었다”고 회고한다.

 

김 동문은 대학원 재학 중 입대해 정보사에서 정보분석요원 등으로 35개월을 꼬박 복무한 뒤 전역, 1976년 초 동아일보사에 입사한다. 동아투위와 백지광고 사태가 어느 정도 수습되었지만 여전히 어수선하던 분위기였다. 여기서 2년정도 근무한 뒤 그의 글솜씨를 눈여겨 본 강영훈 당시 외교안보연구원장(전 총리)의 부름을 받아 외교연구원으로 자리를 옮긴다. 두 번째 직장이었다. 3년 후 강 원장은 주영대사로 부임 차 떠나면서도 김형오에게 각별한 애정과 염려를 표할 정도로 두 사람은 일반적인 상사-부하관계를 넘어섰다. (국립현충원에 있는 강영훈 총리의 묘비명은 가족의 요청으로 김형오가 직접 썼다.) 김형오의 인생 2모작이 여기서 끝나는가 했는데 의외의 손길이 그에게 뻗쳐왔다. 청와대(공보비서실)가 그를 발탁한 것이다. 82년 시작된 그의 청와대 생활(공보·정무 비서실)은 다시 총리실(정무비서관)을 거쳐 청와대 정무비서관으로 마감한다. 2년간의 원외지구당 위원장을 거쳐 1992년 대망의 국회의원 뱃지를 단다.

 

고등학교 때부터 보낸 영도에서 내리 5차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2004년 한나라당 사무총장, 2006년 한나라당 원내대표, 2007년 제17대 대통령인수위 부위원장 등 굵지굵직한 보직을 역임했다. 특히 2008년 7월부터 2010년 6월까지 제18대 전반기 국회의장직을 맡으면서 한국 의회주의를 반석위에 올려놓았다는 평을 받았다. 여의도 국회사에서 그 누구도 김형오 동문만큼 여야간 대화와 타협을 통해 원활한 의회를 운영하려 한 의장은 없다는 것이 언론계 안팎의 일반적인 평가다.

 

국회의원으로서 그의 업적중 하나는 개헌문제를 비롯 이 나라 민주헌정체제를 바로 잡으려는 시도였다. (그는 선거로 당선된 5년 단임제 대통령들이 모두 불행한 비극을 맞는 것은 대통령 권한이 지나치게 비대하고 3권 분립 원칙이 지켜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본다. 재임 초기에는 제왕적 대통령으로 군림하지만 후기로 갈수록 차기 대권 구도로 관심이 이동하여 식물형 대통령이 되고 퇴임 후에는 비극적 종말을 맞는 악순환을 끊어야 한다. 개헌의 핵심은 대통령 권한을 축소하는 것인데 이것은 그냥 두는 ‘무늬만 개헌’, ‘개헌만을 위한 개헌’은 단연코 반대한다. 그래서 그는 노무현 대통령의 원포인트 개헌이나 문 대통령의 개헌안에도 반대했던 것이다. 이와 더불어 정당의 지나친 강대화로 인한 국회의 약화, 국회의원의 정당 눈치보기를 지적한다. “여당은 청와대 눈치보고 야당은 강경파에 끌려 다니고, 국회는 국민의 아픔을 치유하지도 미래를 제시하지도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헌법과 정치관계법의 개정을 그는 필생의 역점으로 두어왔고, 이를 고치지 못하는 점을 아쉬워하고 있다.)

 

2012년 정계를 은퇴하고 나서 김형오 동문은 오히려 필생의 역작을 만들어냈다. 1453년 동로마 제국이 오스만 제국의 공세에 무릎을 꿇고 역사적 뒤안길로 사라지는 그 현장을 팩션(픽션+팩트)으로 구성한 <술탄과 황제>다.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작가의 상상력을 가미해 드라마틱한 장면들을 재구성해냈다. 480쪽이 넘는 대작임에도 유려한 글 솜씨 탓에 술술 읽힌다. 지금까지 47판을 인쇄, 1000권 파는 것도 어려운 인문학의 실종 시대에 5만권이나 판매됐다. 또 작년에는 <백범 묻다, 김구 답하다>란 <백범일지> 해설서도 펴내 화제가 되고 있다. 20여년 정계에서 몸담은 사람으로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베스트셀러의 저자가 된 것이다.

 

기증자료 특별전에서 문희상 국회의장으로부터 기념패를 받는 김형오 동문

 

“<술탄과 황제>는 수차례 현장을 여행하면서 나의 에스프리를 온통 쏟아부었지요. 엄청나게 고생했지요. 어릴 때부터 가슴에 품었던 작가의 꿈을 실현한 만큼 이제 여한이 없습니다” 그는 이제 전 국회의장 김형오 보다 작가 김형오라는 호칭을 더 선호하고 있다. “세 라 비, 이것이 인생 아니겠느냐”고 말하는 그의 조용한 미소에서 그다지 단단하지 않은 몸에도 불구하고 누구보다도 역동적으로 살아온 그의 인생이 잘 정돈된 책장처럼 단아하게 느껴진다. 지난 9월 김형오 자료 기증식에서 그는 김구 선생이 즐겨 썼던 조선 후기 선비 이양연(李亮淵)의 시 ‘야설(野雪)’ 을 읊으며 답사를 마무리했다. “답설야중거(踏雪野中去)/ 불수호난행(不須胡亂行)/ 금일아행적(今日我行跡)/ (수작후인정)(遂作後人程)”. ‘눈길 걸을 땐 어지럽게 걷지 마라. 오늘 내가 걸은 길은 뒷사람에게 이정표가 되리니’라는 뜻이다.

 

우리는 지금 한국 정계에 뚜렷한 족적을 남기고 홀연히 살아가는 한 모범적 용마를 보고 있다.

 

/강성보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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